게송 3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내게 굴욕을 줬다’,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는 사람에게는
그 원망이 가라앉지 않는다.게송 4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내게 굴욕을 줬다’,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침내 그 원망이 가라앉는다.
어릴 때 그런 동화를 읽은 적이 있다. 입구가 길고 좁다란 병 안에 사탕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아이가 그 사탕이 먹고 싶어서, 그 좁다란 병 입구로 손을 넣는 것이다. 그런데 사탕을 꽉 쥐고 나면, 주먹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손이 빠지질 않는다. 아이는 손이 빠지질 않는다며 엉엉 울고, 주변에서 어른들이 달려 온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손에 힘을 풀어 보라고 한다. 사탕을 놓으라고 말이다. 그 말에 아이가 사탕을 손에서 놓자, 마법처럼 손이 빠진다.
이 이야기를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린 시절 한 번 쯤 들어봤을 이야기일 것이다. 안 들어봤어도 방금 들어봤으니 괜찮다. 언제 들어봤는지는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예전에 들어봤든, 아니면 방금 처음 들었든, 우리는 그 이야기의 맥락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병을 살짝 기울이기만 해도 되는 것을, 눈에 보이는대로 근시안적으로 행동하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근데 우리는 아이가 아니더라도 이런 행동들을 왕왕 하고 산다. 당연하게도 중요한 부분은 그 부분이다. 이 이야기를 알든 모르든, 예전에 들었든 방금 처음 들었든, 우리는 그런 우스운 행위를 일평생 지어가며 살아간다.
모든 것에 연습과 숙달이 필요한 이유이다. 들었다고 해서, 알았다고 해서, 저절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하나 연습하고, 배워나가고, 숙달되어야만, 비로소 그 결실이 있고 완성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문한자로는 문혜, 사혜, 수혜, 증혜라고 부른다. 문혜는 ‘들을 문(問)’자를 써서 ‘들어서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보통 우리가 ‘나 그거 알아!’ 할 때, 대부분 우리는 ‘나 그거 들어봤어’를 의미하곤 한다. 안다고 하는 것의 제1단계가 문혜인 것이다.
사혜는 생각 사(思)자를 써서 ‘생각해서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곰곰이 고민해 봤고, 심사숙고해서 결정 내려봤다는 것이다. 보통 독서 토론이나, 영화 감상 모임 같은 데서 많이 발생할만한 얘기이다. 강연 같은 곳에서도 고민 많이 한 질문이 종종 나오곤 한다. 강연자는 질문을 한 저 분의 내공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봤기에 아는 지혜’가 사혜이다. 안다고 하는 것의 제2단계.
수혜는 말 그대로 ‘닦을 수(修)자’를 써서 ‘닦아서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불교는 수행을 하니까 닦을 수를 쓰는 것인데, 일상적으로 말하자면 수혜는 소위 ‘노하우’를 말한다.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를 보면, 달인들이 특별히 어떤 지침이나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하고 느낌적으로 아는 부분들이 있다. 충분히 경험해 봤기 때문에,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그냥 감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수혜는 실제로 수행을 해나가며 깨닫게 되는 지혜를 말한다. 앞서 말 한 것처럼, 반드시 연습과 실천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지식들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로 적고, 그 글을 읽는다고 해서, 다 알 수가 없는, 아주 소소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의,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 뻔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알 방법도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증혜는, 얻을 증(證)자를 써서 ‘깨달아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렇게 쭉 이어져 온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문-사-수-증의 과정은, 숙달되고 숙달되어져, 완전히 통달하게 되고, 그 결과 너무도 확실해져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수료증’ 받은 것이고, 그 수료증이 어디 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그저 형식적인 수료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 자신과 뗄래야 뗄 수 없게 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최종적인 지혜, 제4단계의 지혜인 증혜이다.
이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했냐? 분노에 대해서도, 아이가 사탕을 내려 놓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행복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직접 실천하고, 느껴 깨닫고, 완전히 숙달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분노하고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는 우리는 도저히 좀처럼 행복해질 수가 없다.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이 분노를 하고 살고 있다. 어떤 때는 보면 남에게 책임 묻고 탓하기 위해 살아가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남의 실수에 대해 ‘사정이 여의치 않았겠지’ 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너 심심한데 잘 걸렸다. 너 한 번 망해 봐라.’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마치 분노하는 것이 하나의 게임이고, 하나의 경주라도 되는 양, 서로 앞다투어 분노 게임에 참여하고, 누가 질세라 앞장서 달려 나간다.
이런 마음으로 살다가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여유 전체가 파산하고 만다. 그 자신은 점점 그러한 일에 더 시간을 빼앗겨서, 자기 발전과는 무관한 일에서만 앞다투어 경쟁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세상도 그런 사람에게 당한만큼 또 되갚아 주며, 반복의 반복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작은 실수에도 각박한 규율을 당하는 세상이 되어 간다.
불교는 당연하게도 그런 세상에는 결연코 반대를 선언하는 종교이다. 불교도에게 이것은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믿음의 영역이다. 화합과 조화가 행복을 주는 것이지, 스스로 지어내서 악을 더하며 업보를 쌓아서는, 도무지 행복이란 바랄 수 없는 몸이 되어 간다는 것이 기본적인 불교 교리인 것이다.
왜냐면 생각해 보라. 원한을 쌓으면 원한이 내게도 어느날에는 되돌아 올 것이다. 불교는 집착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 눈 앞에 원한이 되돌아 오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식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는 아닌 것이다. 눈 앞에서 내 원한의 결과가 돌아와 펼쳐지고 있는데도, 그로부터 해탈한다는 것 자체가 난이도로서 쳐도 보통 난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보살들은 이미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가서, 지옥고를 중생과 함께 받으면서도 중생을 구제할 여력이 있기도 하다. 지장보살 같은 분들은 정확히 그런 일을 하는 보살이시고 말이다. 그런데 불교 초심자가 불교를 처음 배울 때에는, 과연 그 자가 그 힘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지옥고가 눈 앞에 있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의 수혜, 증혜가 아니라 고작 문혜 사혜 수준으로는, 불교의 모든 교리가 천 리 밖으로 떠나가고, 당면한 고통에 처절히도 몸부림칠 것이다.
그렇기에 인터넷 공간에서 게임하듯 분노 경주를 하는 일에는 절대로 섞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세상’이 내게 다가와 책임을 물을 때에는, 그런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그 고통을 이겨나갈 여력이 없다.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에게도 고통을 주고 스스로도 고통을 당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불교는 당연하게도, 그와 반대로 ‘스스로의 고통도 줄여나가고 장차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도 줄여나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들은 그 주변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점점 더 천국같은 삶으로 접어들어 간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여기가 곧 불국토다’ 하는 말의 의미이다.
그와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자신에게도 고통을 주고 남에게도 고통을 주는, 그러한 사람들과 동류가 되어, 점점 더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모이게 된다. 그러고 나면 그 사람들의 세계는 지옥같은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다음 생에까지 갈 필요도 없다. 현대라는 시대는 즉시 복을 지어 즉시 과보를 받는 초스피드의 시대이다.
예전이야 농민들이 신분에 묶여 태어난 곳에서 일평생 살아가니 다음 생을 기다려야 했겠지만, 이제는 모두가 자유민이라, 즉시 복을 지으면 즉시 이번 생에 주변 풍경이 바뀌고 이 생과 이 몸으로 즉시 극락에 도달한다. 상품과 서비스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남 편케 하는 것이 다 잘 나가는 상품이고 서비스인 것이다.
남 편케 해주는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 주변에 늘 나누기 좋아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좋은 사람들이 머무는 것이다. 행여 호구처럼 행동하느라 늘 손해를 당한다고 해도 겁먹지 말고 늘 선을 행하면, 반드시 주변 누군가가 그 사람의 선한 마음을 알아 보고, 그를 구제하여 극락같은 무리에 끼워 넣는다.
이를 ‘아니’라고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가? 당신이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고, 어떤 사람이 너무 착해 호구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그를 외면할 것인가?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가진 불교에 대한 믿음이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고, 당신도 그러지 않을 거라 믿는다. 이 믿음이 배신당하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남이 어떻게 하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교도들에게는 늘 ‘내가 어떤사람인지’가 나와 내 삶을 규정할 뿐이기 떄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믿음을 말하고, 다들 이러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말하는 것 자체가, 나와 내 주변을 극락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중 누군가가, 이러한 일에 있어서, 철벽같이 버텨내고 지지대가 되어 준다면, 우리 모두의 삶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 나의 믿음은, 당연히 나로부터 먼저 실행되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나라는 존재’이고, 말 그대로 나 자신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그러하길 바란다.
결국 주제였던 ‘분노’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질 못하였다. 인터넷 세태에 대한 지적만 잠시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분노를 다루는 가장 유효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냥 그러한 것은 즉시에 잊어버리고, 나 좋고 즐거운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즐거움이 주변에도 전염되어 간다. 그러면 우리는 다들 즐거운 극락에 도달한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게송 3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내게 굴욕을 줬다’,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는 사람에게는
그 원망이 가라앉지 않는다.
게송 4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내게 굴욕을 줬다’,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침내 그 원망이 가라앉는다.
나 즐거운 일을 하는가? 주변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즐거워 하는가? 그렇다면 분노는 이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이미 누구도 그런 생각을 품지 않고,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바로 그곳이 맑은 국토, 극락 정토(淨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