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만심은 끝이 없어서, 오늘은 명상 중에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스님들 너무 게으른 거 아냐?’
‘그냥 놀러다니듯이 ‘중 노릇’이나 하고 있구나.’
그렇지 않은가?
전국에 스님이 수만명은 될 것인데,
그 스님들은 다 산 속에 틀어박혀 자기 수행이나 신나게 하고 있고,
정작 자기 수행이 더 급할 나같은 재가 불자가, 고작 아마추어 불교 애호가 재가불자로서,
경전들의 번역 상태가 불만족스러워서,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불타 입멸 후 수 천년이 지났는데,
나 같은 일반인이 불경 해석 같은 데에 ‘끼어들 여지’가 있다는 게,
이게 수만명 스님들이 각자 자기 ‘서원’이라는 걸 세웠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이말이야.
내가 불만족을 느낄 여지도 없었어야 하고,
‘ㅅㅂ 내가 하면 더 잘하겠네’하고 직접 붙들고 있는 일은 더더욱 없었어야지;
그러니까 불만이 난다고 나같은 모자란 중생은.
이거 다 ‘중 노릇'(중 연극 활동)이나 하고 있지,
실제로는 스스로가 닦아 마칠 생각도, 나아가 온 중생을 다 제도할 생각도, 전연 없는 것들이 아니냐고 이 인간들이? << 이런 생각이 난다고.
아 물론 다들 훌륭하시겠지만,
나는 속 좁은 중생 소견으로서, 자꾸 불만이 난다 이거야.
그리고 결국에는 ‘그 불만’이 내 서원이 되는 거겠지.
이게 참 웬수처럼 들러 붙는 숙적이다.
다들 이렇게 들러 붙는 웬수들이 있어서, 서원도 세우고 출가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겠지.
근데 그럼 잘 해야 될 거 아냐??
받아 먹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중생들이
불만족 스러워서 직접 우물까지 파야 하겠냐고?
출가해서 한가한 인간들이 자기 시간 쪼개 시간 내서 해야지!
잡아함경 같은 거 기초 번역은
이미 완역된 완성물이
펭귄밀크처럼 다 나왔어야지!
다 그냥 그럴듯하고 멋드러진 문장들 추종하느라
여기도 화엄경이요 저기도 뭐요
다 그냥 문화생활하듯 유행 따라 ‘스타벅스 찾는 중생처럼’ 쫓아나 다녔지,
이런 기본적인 것들도 끝내 마치지를 못해서,
잡아함경 맥락에서 보면 어차피 후대 경전이 다 한줄로 꿰어지는 건데,
이것도 다르고 저것도 다르고 문자 따라 다 다른 거라고 중생 착각 하는데, 그러한 것들을 막지를 않고.
예를 들어 보라고.
잡아함경 1번 경전에 이미
‘당관색무상, 여시관 정관’ 하고 말하고
15번 경에 벌써
‘당독일정처 전정사유 (중략) 약욕자증 즉능자증’
이렇게 설하고 있다고.
그리고 사조도신의 입도안심요방편문 보니까
“반야바라밀에 대해 듣고, 반야관을 닦아 들은 바와 같이 된 연후에야, 그때부터야 일행삼매를 (행할 때에), 퇴전도 무너짐도 없이(불퇴불괴), 홀로 생각을 일으키거나 다투어 의론할 여지도 없이(부사의), 장애도 모양도 없게끔(무애무상), 행할 수가 있다.”
“일행삼매란 법계가 무릇 공하여 일상(一相)이니, 그 법계일상(法界一相: 공한 모습)에 마음의 반연함을 매어두어, 온 법계가 마치 군대 도열하듯 체계적으로 전개되어, 하나의 모습(법계일공상)으로 현현하는 삼매를 말한다.”
시작부터 이런 설명들이 있단 말이지.
이게 바로
‘당관색무상'(응당 물질이 무상하다고 보라)하여
‘여시관 정관'(이것이 바른 관찰이니),
‘당독일정처'(하나의 고요한 거처를 마련하여 홀로 머물며),
‘전정사유'(오직 그 하나를 집중적으로 사유-일념 정진-하면) (중략)
‘약욕자증 즉능자증'(만일 깨닫고자 하면 스스로 그냥 깨달을 수 있다)
하는 잡아함경 말과 결국 같은 말이란 말이지.
‘당관색무상'(응당 물질이 무상하다고 보라) = 법계가 무릇 공하여 일상(一相: 공한 모습 한 모습 뿐)이니
‘여시관 정관'(이것이 바른 관찰이니) 전정사유(오직 그 하나를 일념 정진-집중적으로 사유-하면) = 그 한 모습에 마음의 반연함을 매어 두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약욕자증 즉능자증(만일 깨닫고자 하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 일행삼매를 (행할 때에), 퇴전도 무너짐도 없이(불퇴불괴), 홀로 생각을 일으키거나 다투어 의론할 여지도 없이(부사의), 장애도 모양도 없게끔(무애무상), 행할 수가 있다.
결국 같은 내용이란 말이지.
무슨 수일불이(하나를 지켜 움직임이 없게 한다) 이런 게 무슨 도가 계통의 영향을 받고, 그게 아니라 그냥 원래의 ‘여시관정관’ ‘당득일처 전정사유’ 그대로란 말임.
긍까 초기 경전에 대한 정리를 안 해 놓고,
휘황찬란한 무슨 묘법연화경이니 대방광불화엄경이니, 이런 눈 돌아가는 소리에나 혹해서 듣고 앉아 있으니까, ‘망념시중생'(망념이 곧 범부 중생이다)하는 말마따나, 스타벅스 찾는 중생과 같은 꼴을 하고 있게 된단 말임.
그러고 나서 학자들도, 좌선하는 선종은 도가를 따라하려는 시도라는 둥..
좌선한다고 도가면, 보리수 아래 좌선하던 석가모니는 무슨 곤륜산 원시천존이냐?
그러고 나니까, 나머지 중생들도, 이미 ‘법계가 공하다’ ‘공하여 공한 모습 한 모습 뿐이다’ 이렇게 하는 말을 듣고도, ‘이건 다른 설법이다’ ‘예전 설법과 요즘 설법이 다 다르다’고 보는 견해에 빠져 버리는 지경에 가는 거지.
심지어 논문 몇 편 보니까 후대의 선종이 동산법문의 가풍과 달라졌다고 해.
근데 동산법문의 가풍이 뭐야? 내가 도신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을 보니까 이렇게 말을 해.
‘제불의 마음이 곧 최상승법문이다’ +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망념이 곧 중생이다.’ + ‘법계가 모두 공하여 공한 모습 한 모양이니, 법계를 반연하는 마음으로써 다만 이 한 모양만을 관찰하면, 그것이 <일행삼매>다.’ + ‘일행삼매를 극상으로 펼치려면,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 그 들은 바와 같게끔 배워 마쳐야 한다.’
이거란 말이지.
그럼 초학자가, 반야바라밀을 들어 법계공상에 대해 관법을 닦아 마치고, 그 ‘법계일공상’을 모든 법계 물물들에 적용하여 마치 ‘군대 도열하듯’ ‘그 하나의 모습’이 모든 두두물물에 불퇴불괴하게 펼쳐지는 <일행삼매>를 성취하면, 이것이 법계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망념을 여의는 고로, 곧 중생도 아니어서, 즉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자, 부처 그 자체가 되고, 그 마음에 의지하면, ‘최상승법문’을 얻는 것이 된다는 것이, 바로 거의 ‘연역적으로’ 추론이 된단 말이지.
이게 후대의 ‘심즉시불'(이 마음이 곧 부처다)과 다를 게 뭐냐고.
물론 동산법문 당시에는, ‘대품반야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았단 말이지.
근데 후대에는 ‘금강반야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으로 변경이 되었어.
근데 그게 변화가 있는 걸까? ‘반야바라밀’을 들어 배우고 반야공관을 닦는다는 기본 사항은 그대로 가고 있는 거지. 심지어 지금의 선종조차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소의경전으로 한단 말이지. 그럼 대체 뭐가 바뀌었다는 거지??
아니 내가 15년 전에 화두를 받을 때 조차, 기초 소양을 체크하시려는 듯, ‘6근이 뭐냐?’하고 물으셨어. 근데 내가 일단 잠시 착각해서 ‘색수상행식’이라 답하긴 했는데, 그것만 듣고도 내가 반야심경을 충분히 수지독송했다는 것을 파악하셨는지, 그걸 확인하시고 나서야 화두를 주셨단 말이지. (물론 이제 내 ‘색수상행식’ 답변을 고쳐 주시려고 ‘안이비..’ 하고 말씀 입 여시는 것과 동시에 나도 그 소리에 아차 하고 ‘안이비설신의’를 같이 답하긴 했어.)
그러고서 내가 화두 참구를 했단 말이지. 결가부좌하고 하루 8시간씩. (2시간 x 4번 – 아침, 오후, 저녁, 새벽)
그럼 안 바뀐 거지. 그대로지! 오히려 당대의 중생이 더 잘 이해할만한 반야부 계통 내의 다른 경전으로, 수단적인 교체만을 한 거지. 종지가 그대로인 거잖아.
법계가 공하여 일상이니, 그 일상이 계속 현전하는 마음이 곧 견성한 성불의 마음이라고.
법계가 공하여 일상이니, 그 ‘평평한 상태’가 곧 해탈을 이루는 방편적 진리, 즉 ‘도(道)’라고. 평상심이 도이니라.
이게 전부 한 꿰미에 꿰어져 있는 얘기들인 거임.
그리고 이게 잡아함경과 다를까?
잡아함경에 이미
당관색무상(응당 물질적 현상들을 무상하다고 보라), 여시관정관(이렇게 보는 것이 바른 관찰이다)한 뒤에
여관무상, 고,공,비아 역부여시(무상하다고 보는 것처럼, 고통이라고 보는 것, 공하다고 보는 것, 내가 아니라고 보는 것, 역시 모두 마찬가지로 같다.)
그니까 결국 이 일관(一觀)을 성취하는 게, 고릿적부터 하던 똑같은 일이라는 말임. 그 일관을 성취해서, 더도 덜도 없는 완전 평평한 상태에 가면, 그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 위 없는 모두 고르게 평평한 깨달음)라 한단 말이지.
이거 결국에는 그냥 ‘일행삼매’ 그 자체야. 하나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추론/전개/도열되는 삼매. 여기 쓰인 행行의 원어 자체가 Vyuha(전개, 정렬, 군대 도열, 진형)을 쓰고, 동의어마저 아예 일상(一相)삼매라고 하거든.
무상,고,공,비아 관을 <끝까지 전정사유> (추론, 전개, 군대도열, 정렬)하여, 더이상 더 나아갈 수 없는 완전히 평평해진 상태,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고, 일행삼매의 성취 결론이고, 그 ‘평평한 마음’ 그게 평상심이 도이다고, 그 마음이 곧 즉심즉불(이 마음이 곧 부처다)할 때의 ‘이 마음’인 거임. 이 평평한 상태를 이심전심으로 주고 받는 거고. (실질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게 아냐. ‘아 너도 이제 나랑 같구나’ 하는 거지.)
결국, 선종이 변한 바가 있다고 본다면, 심학적으로는 물론이요, 심학적으로는 커녕, 교학적으로도 전혀 충실하다고 할 수가 없음. (횡설수설 하는 소리 들을 때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르고 떠드나?’ 이런 생각 뿐이야. ‘말로만 하고 직접 해보진 않나?’ 이 생각이 계속 든다고.)
대체 여태 뭐하고 다들 지 발등 가려운데 남의 발등 긁는 소리나 하고 있느냐고?
나는 소견 좁은 일개 중생이라 화가 난다 그냥.
동아시아 불교가 변질돼서 초기 불교랑 다르대. ㅅㅂ 읽어 보니까 똑같애.
선종은 여래장설에 의지해서 반야공관과 어긋난대. ㅅㅂ 읽어 보니까 똑같애.
장난하냐?
이것들이 아주…
수행 똑바로 안 해??
자기 경험이 모자라니까 ‘사과랑 링고랑 애플이 각기 다 다르다’ 하는 미친 소리를 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아 물론 풍토 따라 다르기야 다를 수가 있겠지.. 근데 결국 그게 같은 거잖아 ㅅㅂ? 사과를 애플이라 불렀다고 귤이 되냐고? 그건 아니잖아? 아니면 뭐 사과 수출할 때 ‘버내너’ 라고 이름 붙여서 팔 거냐고? 아니잖아? 결국엔 사과가 애플이고 애플이 링고잖아. 맞잖아.
애플이라고 부르는 거 딱 보면 사과고, 사과라고 부르는 거딱 보면 애플이잖아. 자기 다루는 분야에, 스스로 경험 모자라, 그 정도도 딱 보고 못 알아 보면, 그게 그냥 사람 열받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지. 뭔 변질됐다는 둥, 틀렸다는 둥, 정법을 세워야 된다는 둥..
너나..
잘해라…
아니지.
나 열받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렇지?
나는 소견 좁은 일개 중생이라 이 대목에 가서 열불 천불이 나 그냥. ✊🔥🔥
2025년 10월 27일 월요일 오후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