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함의 청구서: 이상적 권리와 현실적 비용 – 다양성의 함정과 국가 경쟁력에 관하여

선(善)함의 청구서: 이상적 권리와 현실적 비용

– 다양성의 함정과 국가 경쟁력에 관하여

인권 확대, 평등권 확대 등은 분명히 ‘보편적 인류사의 발전 방향’이 맞음.

왜? 상인이 무슨 정치에 참여를 해? 농민이 무슨 정치에 참여를 해? 그러나 그런 정치 참여 권리, 즉 ‘참정권’ 확대로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 감히 일반인이 ‘페이스북’도 하고 말이지.

그리고 그건 예를 들어, 즉 그러한 ‘방향성’이란, 앞으로 소수자들이 소수자로서의 자기 편의에 맞춰진 제도와 복지를 요구할 권리에도, 장차 충분히 확대되게끔, 세상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함.

예를 들어,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밝히기만 해도 ‘너 게이새끼냐?’ 하는 문화에서는, 그 게이들이 모여서, 자기들 필요에 맞는 정책을 요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건 ‘상놈들이 무슨 배움이 있어서 의견을 내고 정치를 해?’ 이런 문화에서 상놈은 정치는 커녕 배울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인 거거든.

우리가 이미 이와같이 sns에서 떠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인권과 평등권, 기타 등등 다양한 권리는, 계속 더 늘어나고 확대될 수밖에는 없음. 그리고 그게 대부분의 경우 국가 발전에도 더 유리하고.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대우가 좋아서, 모든 사람들 중에 잘 교육 받고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은 국가는, 교육 못 받고 한정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은 국가보다, 앞 설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니까.

그런데 인제, 효율과 비용 문제라는 게 있음. 효율과 비용 문제에 있어서, ‘획일적인 통제 국가’에 밀리게 되면,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끌어 올리는 그런 정책은 할 수가 없음. (체제 열위에 놓이게 되면 지옥이 되기 때문임.)

또한 왜냐면, 국가 정책에서 ‘국가라는 집단의 생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국가에 의한 복지’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까. <국가가 있어야 국가가 복지를 하지.> 그게 싫으면 오히려 애초부터 알아서, 각자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기 복지를 실현하며 살아야 하는 거고.

때문에 ‘국가라는 집단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복지나 평등을 확대하는 것의, 늘 선행조건일 수밖에 없음. 물론 이제, 정도의 문제가 있고, 어디에 얼만큼을 담을 것인지, 늘 포트폴리오적 비중 문제, 미세 조정 문제가 중요한 부분이지만.

예를 들어, 그리스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멸망당한 일을 잘 생각해야 함. 아테네는 민주정을 도입하면서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지. 그런데 군사국가 스파르타의 강력한 효율성은 아테네의 다양성이, 충분히 창의적 효율을 산출해내지 못하는 때에, 비수같이 꽂혀서 아테네를 일종의 식민지로 복속시켰음.

사람들에 따라서 도편추방제 변질로 민주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억압적 사회 분위기가 가득했다고, ‘민주정이 충분히 다 실현되지 못한 것’, 거기에서 아테네 패배의 원인을 찾으려 하기도 하지만, 아테네 민주적이 아무리 변질되어도 스파르타보다 더 억압적이고 획일적이진 않음. 스파르타와 비교해서 어떻게 변질되었어도 이미 충분히 많이 민주적이고 굉장한 의견 다양성이 보장됨. 그냥 최종 창의-효율 산출에서 밀린 거임.

또, ‘팍스 로마나’ 라고 하는, 로마 패권에 의한 지중해 연안의 평화 시기가, 공화정 때가 아니라 원수정 때라는 것도 유의미한 관찰 부분임. 사람들은 흔히 민주정과 공화정을 정의나 선으로 여기길 좋아하지만, 로마가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 그리고 원수정에서 전제정으로, 통치체제를 변경하며 계속해서 환경적 적응을 하지 않았다면, 막상 로마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못했을 거임.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듯이 ‘다양성’은 창의성을 유도해내면서 일순간 비약적 발전을 이끄는 데에 꽤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그런데 그러나, 그 산출물을 다시 ‘획일적’으로 집행하는 ‘효율성 제고’의 과정이 없으면, 사회가 무책임하게 산만해지면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함.

그래서 늘 인권과 복지의 문제도, <그러면 그 비용이 과연 우리 사회가 감당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도달해서, 이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끝이 나야 함.

그걸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는 좌파는, 사실 좌파 자격이 없음. 그냥 ‘기독교적 교조주의’와 다를 게 없기 때문임. 전통 사회주의자들이 봤을 때 한심해 보일 것임.

‘이게 선이니까, 너는 따라라. 안 그러면 마녀.’ 한심한 인간들임. 한국 좌파 대부분이 이렇다. (우파는 우파의 얼탱이 터진 문제가 있지만, 좌파의 문제는 이렇다고.)

쉽게 말해 ‘선하니까 옳다’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음.

왜냐면 ‘선하다’는 것은 역사와 시대,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늘 약간씩 다른 의미이기 때문임. 물론 누군가는 그걸 의도적으로 감추며, 자신이 어느 상황에건 옳다는, ‘내로남불’ 주장을 상시 패시브로 발동 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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