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체유부를 위한 변론: ‘존재한다’는 말은 아무런 죄가 없다>

<설일체유부를 위한 변론: ‘존재한다’는 말은 아무런 죄가 없다>

결국 반야부는, 불교에 속한 오온론 등 존재론적인 모든 부분들이, 결국엔 모두 ‘명색’에 속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모든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시킨 것에 불과하다.

– 반야부가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시켰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하는 순간, ‘일체는 곧 12처다’라고 설한 부처의 말과 배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분명 부처는 일체는 12처고, 12처가 무상하니, 이 12처를 잘 관찰하면 해탈에 이르리라 하고 설하였는데, 12처 자체가 그냥 ‘모두 없다’고 하면 이제 그 중생은 어디로부터 무엇을 관찰해야 하겠는가?

– 다시 말해, 중생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찰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것들은 사실은 없는 것이다’ 하고 아무 과정도 없이 아주 극미묘하고 심심미묘한 인식론적 차원으로 ‘급발진’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론적으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아주 가소로운 ‘의기양양!’ 한 태도로 말이다.)

근데 이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와는 사뭇 무관한 지점이 있다. 부처가 진리를 현시할 때에, ‘무상하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해탈할 수 있다’ 이러한 방편과 목표의 구조를 띄는 것이 많다. 그런데 따라서, 이것은 맥락적으로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해탈을 유도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될 뿐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해탈의 맥락에서 반야부가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시켰다면, 다시 마찬가지로 해탈의 맥락에서 다른 불교 흐름이 등장해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다시 환원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이미 존재하는데, 왜냐면 인식론으로 환원시켜서 ‘모든 것이 비었다’고 한 뒤로는, 오히려 중생의 삶과 너무나도 괴리되기 시작하면서, 중생이 도저히 납득하고 닦아 나가 수증할 여지란 없는, 말 그대로 논리만을 위한 논리, 즉 희론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불교 전통에는 이미 ‘승의제’와 ‘세속제’를 나눠서, ‘이것은 승의제의 일이요’, ‘이것은 세속제의 일이요’ 하고, 진리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가 마치 각각 다른 원리로 돌아간다는식 서술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건 반야부 전통의 인식론적 환원을 통해, 이미 불교가 지나치게 중생의 시각에서 괴리된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공법공설은 심오한 철학을 말하지만, 동시에 어느 중생도 해탈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게추이기도 하다.

‘생각을 가만히 관찰하여 보아라. 그것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실체가 없어 허공에 부는 바람같이 비어 있고 무상한 것이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생각은 원래가 빈 것인데 왜 관찰하는가? 관찰하려 하는 즉시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제법 반야관의 극성에 도달한 관점이라 할만 하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그럼? 그 말을 듣고 관찰을 안 하면 과연 부합하겠는가? 도시에 가면 시골에는 없는 큰 도둑들이 있어, 문이 잠겨 있어도 잠긴 문으로 드나들고, 문이 열려 있어도 열린 문으로 드나드니, 그대는 이 도둑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잠시 묵묵한 후에) ‘그 도둑이 다 털어가더라도 금덩이 낳는 망아지가 있어 다 훔쳐가더라도 내게는 헛 일이네.’

이렇게 말한다면 제법 그나마 이제가 균형을 갖춘 안목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안목들의 문제점은, 역시나 중생이 전혀 조금도 이해할만 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부터가 썩 선교방편으로써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차라리 존재한다고 말하고, 소중하다고 말하며, 잘 지키라고 말하는 불교는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보라, 다 없다고 하는 와중에도 계율은 지켜야 한다는 둥, 누가 그 소리를 정신병 걸린 소리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 모두가, 어거지로, 중생의 존재론적인 모든 것을 인식론으로 환원시키려 하는, 그 희론적 시도에서 오는 것이다. 머리로는 명쾌하겠지. 잠시 머리 속이 시원하겠지.

그러나 그뿐, 그것으로 어느 중생도 해탈되지 않는다. 그런 쓸모 없는 불교 이론은, 그 자체로 중생의 해탈이라는 불교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에 반하며, 죄악 그 자체이다.

온갖 화상 노인네들이 죄를 너무 많이 지어 해탈하는 중생들이 날로 적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무엇이 존재한다는 말도 못하는 불교는, 그냥 틀린 불교다. 오히려 존재하기에 해탈하는 것이며, 이 모두가 존재하고, 오히려 나아가면 ‘존재함으로써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세속제에 의하지 않고서는 승의제를 구할 수 없다'(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고 말한 용수의 본 뜻이다.

‘무엇 무엇이 존재한다’ 는 말은 전혀 아무런 죄가 없다.

그것은 중생이 알기 쉽고, 직접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늘 옳다.

그것을 부처님이 일평생에 걸쳐 추구하였는데, 불교가 너무나도 거꾸로 떠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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