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인의 수행

속세인으로서 수행을 하다 보면, 아 물론 출가인은 정해진 규율과 시간이 있겠지만, 속세인은 다들 중구난방이라.

그래도 속세인도 수행이 오래 지속·반복되고, 깊어져 들어가면, 나중에는 내가 수행을 하는 게 아니라, 수행이 나를 하는 단계로 들어간단 말이지.

이게 무슨 ‘수행에 잡아먹힌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적당히 해야 할 시간, 혹은 할 수 있는 시간에, 저절로 수행적 흐름이 시작돼서 삼매와 선정에 들고, 깊이 들어갔다가, 몸과 마음이 치유된 상태로 개운해져서 나온단 말이지.

긍까 이게, 어느 단계에 가면, 내가 수행을 의도적으로 찾아서 하는 게 아니라, 수행이 적당한 때에 나를 찾아와 한다는 말임.

그리고 이거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불보살이 날 오며가며 살피고 돕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너 이때 수행 해둬야 하루 종일 몸이든 마음이든 편할 거잖아?’ 하고 권유하고, 나는 그 수행적 흐름에 응하는 걸로 ‘아, 글치.’하고 답을 하는.

물론 비유적인 거지만, 그리고 굳이 ‘내 습관과 무의식이 저절로 일으키는 흐름이다’ 하고 엄격히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엄격함을 조금 내려 놓고 생각해 보면, 흡사 ‘불보살이 찾아와 돕는 듯한’ 느낌도 있음.

내가 인연 맺었던 스님들, 스승들이 살펴보시는 듯도 하고. (실제로 한 스님은, “그래 너는 이렇게 인연이 되었으니 늙어서까지..” 하고 좀 봐주시겠다는 뉘앙스의 말도 하셨음. 그분이 뭐 얻을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한동안 (한 10년?) 연락이 끊기기도 했는데, 내가 다시 연락처 찾아 연락하자, “이렇게까지 해버리면 역시나 어쩔 수 없이..”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심. )

뭐 처음 15년 전에 말 들었을 때는 ‘내가 너를 좀 괴롭히겠다’ 이런 투였는데, 괴롭히겠다는 게 고통스럽게 하겠다는 게 아니고 수행시키겠다는 거겠지 뭐.

아무튼 한 번씩 저절로 흐름이 열려서 무슨 포탈에 집어삼켜지듯 삼매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그리고 그 흐름이 열릴 때에, 내가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의도와 마음을 집중하면, 그 흐름 타고 아주 깊게도 들어가게 되고.

이게 속세인의 중구난방식 수행이, 수행을 이어가는 방식이리라.

근데 그런 흐름과 포탈을 감지하고 몸을 맡기려 해도, 일단 그 이전에 자기 수행력이 어느 단계 이상으로, 뒷받침은 되어야 함. 나도 7년차 이후부터 그렇게 됐음. 지금은 좀 더 스무스~ 하긴 함. 긍까, 무형의 소통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거지. 처음에는 ‘이걸까?’ ‘저걸까?’ 하고 의문과 혼란 투성이였다가.

 

– 해밀문 장문인, 해밀장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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