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我)무아’와 ‘법(法)무아’ : 두루 평등한 깨달음

불교가 원래부터 있던 출가사문 전통과 선정 수행 전통에서, 특수한 부분을 제기한 것은, ‘아-무아와 법-무아’라 할 것이다.

아(我)무아와 법(法)무아라는 것은, ‘나’라는 것에도 내가 없으며, ‘세상’에도 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무아관이 강력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것에서 삼매의 관성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다.

앞서 서두에 출가사문 전통과 선정수행 전통을 얘기했다. 부처가 깨닫고서 출가사문 전통과 선정수행 전통을 폐기 했는가? 아니다. 그 둘은 계속 같이 간다. 그렇다면 부처의 가르침은 오히려 출가사문 전통과 선정수행 전통의 ‘정수'(내가 해보니까, ‘이렇게’ 하면 더 잘 된다!)로서 제시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법(모든 현상)이 펼쳐지는 법계(이 세계)가, 모두 통틀어 단 하나의 모습(一相)일 뿐이며, 그 하나의 모습은 ‘무아’로서 ‘빈 모습(空相)’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무아관을 닦는 자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볼 때에도 늘 ‘하나의 빈 모습(一空相)’을 볼 뿐이고, 외부 세계를 볼 때에도 늘 ‘하나의 빈 모습(一空相)’을 볼 뿐이다.

하나의 대상을 반복해서 관찰하고, 하나의 대상에 반복적으로 집중하면, 그것으로 언제나 삼매는 발생한다. 이것은 삼매 수행을 하는 모든 수행자 전통에서 일관되게 주장되는 것이다.

호흡을 관찰하든, 아미타불의 모습을 떠올리든, 아니면 아예 기복적으로 부자 되는 것에 집중하든, 상관이 없이 한 대상에 생각을 매어 두면, 그것으로 차차 익어져 선정과 삼매가 다 발생한다.

그런데 ‘무아관’이라는 것은, 내면으로 안을 볼 때에도, 외부로 밖을 볼 때에도, 그 선정과 삼매로부터 벗어남이 없는 삼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모두 무아로서 하나의 빈 모습임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마주 대하면서, 그 사람의 삼매와 선정은 불퇴전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앞을 보아도 하나의 대상이고, 앞을 보지 않고 내면을 보아도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하나의 대상에 생각을 매어둠’이 증진되며, 계속해서 선정과 삼매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하려 그 선정과 삼매가, 두루하여, ‘그것 아님이 없게’되면, 이것이 바로 ‘두루 평등한 깨달음’ 즉, 무상정등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 상태로부터 후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한 모습임을 너무도 반복적으로 확증한 결과, ‘두루 평등’ 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초기 경전들을 보면 득일정처하여 전정사유함을 깨달음의 핵심 방편으로 나열하고 있다. 즉, 하나의 고요한 거처를 얻어, 전념을 다해 ‘오온이 공하다’는 그 하나의 가르침을,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고찰하며, 전념하여 사유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으로 그 당시에 많은 아라한이 탄생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무아관’이 끝없는 두루한 삼매를 발생시켜, 불퇴전하게 하며(수행력이 물러서지 않게 되며), 두루 ‘그것 아님이 없게’ 하며, 그리하여 ‘완전히 평평하여 줄지도 늘지도 않는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완전히 명심견성 하는(이 세계의 본성이 두루 공함을, 밝게 깨치는) 것이다.

그것이 법계일공상, 즉 반야바라밀이 ‘대지혜’라고 불리는 이유이며, 반야관을 닦으면 삼매가 끊어지질 않게 된다. 안이든 밖이든, 두루 만물을 볼 때, 만물을 보는 것이 곧 모두 각각 하나의 재료(‘비었다’고 보는)가 되어, 무엇이든 그것을 보는 즉,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삼매’를 이루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삼매’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눈을 감고 다니니 주변 사람들이 타지의 낯선 사람들로 생각되었는데, 눈을 뜨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내 가족과 친지들이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비유컨대 늘 가족과 친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외롭던 타지 생활은 이제 끝나버렸던 것이다.

모든 것을 볼 때 늘 삼매가 증진되며, 이렇게 되었을 때 깨닫기란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이 된다. ‘모두 비었다’는 깨달음으로부터, 늘 둘러싸여 있어, (거꾸로) ‘벗어날 길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이루어야 할 것’으로 내내 생각해왔더니, 여기에 갔더니 깨달음에 ‘둘러싸여’ 있었다(도리어 내게 깨달음의 총구를 온 사방에서 들이 밀고 있어, 깨달음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걸 그대로 맞고 전사하는 순간, 나는 오간데 없고 깨달음만이 존재하게 된다. 부처의 출현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여기로부터 상, 락, 아, 정[영원함(常), 즐거움(樂), 참된 나(我), 깨끗함(淨)]의 열반4덕이 다 나오게 된다. 고통이 반복되는 윤회는 끝났다. 그대가 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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