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은 계속해서 해탈하게 하는 근원적 동력>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이 말처럼 자성청정심의 원리를 잘 설명하는 명문이 없다. 개혁교회는 <개혁교회>라고 도그마적으로 고착화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롭게 개혁되고 있는’ 하나의 ‘상태’라는 것이다.
자성청정심과 여래장을 아트만론으로 몰아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선종이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자신의 의도를 따라 의도적으로 자꾸만 망각하려 노력하는 듯 보여진다. 나는 이런 시도는 다분히 악의적이라고 본다.
개혁교회가 고정된 것이 아니듯, 자성청정심이나 여래장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하나의 이해나 시각인데, 그것은 계속적으로 해탈을 야기하기 때문에, 지칭할 대상도 없고 지칭 받을 언어도 없다. 그런데 어차피 그러하기에, 그걸 뭐라 지칭하든 실제로의 수행 안목에 있어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똥이라 하든 뭐라 하든 말이다.
마치 하나님을 누가 ‘두개님’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 하나님이 두개로 갈라지는 게 아님과 같다. 말은 결론적으로는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관법은 무엇이든 대상과 분리되거나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떨어져 나오도록 마치 자전거 타며 중심 잡는 감각처럼, ‘미묘한 균형감으로 조절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진다. 소위 말하는 성성 적적이라는 것이다. 너무 어거지로 떼어내려 해도 오히려 떼어내는 경향이 새롭게 집착성의 방향으로 뭉쳐서 유통되는 흐름이 나오기 때문에, 너무 어거지로 떼어내려 하지도 말고, 또한 반대로 너무 몰입해서 개입하고 새롭게 계속적인 힘을 얻게끔 만들지도 말고, 그저 가만 가만 담담히 비추며, 그 오는 곳 없이 옴과 가는 곳 없이 감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며, 그 반복된 경험상의 체험에, 스스로의 자아상의 억셈이 녹아지며, 계속지속적으로 비고 또 비는 상태로 수럼되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성성적적’ 즉 ‘분명하게 또렷한'(성성) 동시에 ‘고요하게 적막하다'(적적)의 묘리가 된다. 물론 이것은 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에의 수순’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진여에 수순해 나가면, 여래장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란, ‘본래 비었음’의 사실, ‘본래 온 곳 없이 오고 간 곳 없이 감’이라는 사실이, 그냥 하나의 사실이기에,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게 통용된다는 말을, ‘모든 중생 안에 여래장이 있다’고 제법 멋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비었다는 그 사실은 모두에게 공통이기에, 진여에의 수순, 즉 ‘비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에, 스스로의 억센 심리의식적 파도가 녹아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마치 본래의 사실이 그러하기에, 그 결과로 ‘모두에게 공통되게 비었다는 사실’ 즉 여래장이, 그에게서, 그의 내부에서, ‘드러난다’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두 동일하다는 ‘모두 동일성’, 이것이 부처가 중생에게 ‘부촉'(너는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하는 개별적 예언)을 하는 원리이며, 이렇게 ‘모두에게 공통되어 통용되는 사실’에 기반하기에, 불교는 이것을 ‘진리’라고 천명하곤 하는 것이다. 본래 모든 것이 오는 곳 없이 오고, 가는 곳 없이 간다는 사실 말이다. 이러한 ‘비었음’을 의지하기에, ‘비었다는 공통된 사실’ 그 자체에 의지하는 존재가 ‘본래 그대로 오는 존재’인 여래이며, 이렇게 ‘비었다는 공통된 사실’을 모든 존재가 본래 비어 모두 동일하게 공유한다는 이치가 담긴 말이 곧 ‘여래장'(모든 중생 내부에 완전체로서의 결격 없는 여래가 들어(숨겨져) 있다)이라는 말인 것이다.
때문에 여래장이 본래로 반야의 원칙들을 전혀 어긋나거나 벗어나고 있지 않기에, 이것이 아트만론이라 주장하는 말들은, 나는 실지의 안목이 ‘옴 없이 옴’과 ‘감 없이 감’을 단 한 순간도 실제적으로 직시해내지 못한, 수행 미력의 오점이 있는 견해라 여기는 바이다.
여래장 교설은 아트만을 세우는 이론이 아니라, 망상을 비워 갈 때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청정지견의 여실한 가능성과, 관법이 힘을 얻어 가면서 발생하는 법성(즉 공성)의 체험적 사실성을 가리키는 방편적 언어에 가깝다. 그러므로 초보 수행자에게 “여래장이 있으니 수행하면 반드시 부처가 된다”고 권면하는 것은 실체론이 아니라 교화론적으로 우수한 방편이다. 문제는 여래장이라는 명칭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남용하는 관점에서든 반박하는 관점에서든 결국 이를 ‘실체화’하는 오독에 있을 뿐이다.
즉,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선불교의 기본 전제와 수행 맥락을 수행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비판자가 이를 의도적으로 누락한 채 여래장 교설만을 떼어 실체론으로 재단하는 태도야말로 실제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진여에 수순한다, 자성청정심이 계속해서 해탈케한다, 우리 안에 여래장이 있다, 이 말들은 법계가 오직 하나의 공한 모습일 뿐이라는 ‘법계일공상’설을 다른 말로 풀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우주 법계가 본디 비었다’라는 사실 자체가 온 법계에 너무나도 충만하고 그 자체로 부증불감 결함없다는 것에 의지하여, 나열한 나머지의 언설상이, 마치 법신에 의지해 화신불이 출현하듯, 모두 나오게 된 것일뿐 그 외에는 없다.
여기서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법계 어느 곳을 보더라도 공한 모습 한 모습이고, 그러한 상태로 온 법계가 가득가득하다는 체험적 심상을 전달하기 위해서이지, 이것을 새로운 실체로 세우려함은 아니다. 다만 관법의 숙달에 따른 공성의 전면적 현전, 체험적 전면성, 을 ‘충만’이라는 어휘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공한 모습 한 모습’의 ‘한’도, 하나의 단일한 실체를 세우려는 게 아니라, ‘동일한’ 모습(일미一味)이라는 상태적 의미일 뿐이다.
나로서는, 비었지만 다들 밥 먹고 살아가면서, 비었지만 여래장이라 지칭할 수 있다는 이 원리를 모른다는 것이 참으로 아리송할 따름이다. 마치 불교가 표방하는 중도의 교설을 등지고, 대놓고 양극단의 설만을 취하고자 애쓰는 듯 보이지 않는가?
그간 밥은 어떻게 먹었는가?
그 도리를 참구하면 여래장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