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공론주의자에 대한 결별 선언

[서문: 역사적 공론주의자에 대한 결별 선언과 보살의 도]

나는 진짜 모르겠다. 나는 역사적 공론주의자들을 앞으로의 지표로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 고작 그 정도의 방편도 두루 쓰지 못하는 것은, 보살로서 전혀 좋은 솜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관법과 말로 쓰여진 삼매는 다 한 번씩 닦아봐야 그나마 쓸만한 놈이 될 것이다. 아무리 봐도 문자에 집착하는 놈들은 그냥 관법이 약하다.

내 결론은 아래와 같다. 여래장설은 유용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그러한 ‘하나의 방편’은 많을수록 중생을 제접하는 데 좋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단 하나의 방편’ 같은 것이 있다면, 왜 석가모니는 45년간 수만 가지 설법을 해야 했겠는가?

‘누구에게나 통하는 최고 최종의 단 하나의 방편’에 도달하려는 그러한 헛된 노력 자체가 오히려 ‘실체를 더듬는 아트만적인 유위행이고, 유루법이며, 부처를 비방하는 생사윤회행’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 실체가 없고 중생도 실체가 없어, 그 인연 따라 필요한 방편이 각각으로 수만 가지가 있어, 두루 선방편을 구비해야 좋은 솜씨 보살이 되는 것이다. ‘공’론 주의자들은 보살의 선방편이 무엇인지, 다음 생에도 도무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게 다 ‘관법’이 약하기 때문이다. 늘 ‘무슨 무슨 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은 관법이 약하고 방편이 두루하지가 못하다. 앞으로 장차 차분히 8정도 행하며 보살이 되긴 다 글렀다 이 말이다. 나는 정말 맘에 안 든다. 절대로 긍정치 않는다.

이 모두가 ‘해탈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위주로, 효용론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지극히 존재론적으로 탐구하는 것의 결말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유위행이다.


[요가차라 해밀문(解密門) 학설 및 종지 요약]

1. 문파의 정체성: 신비주의 배격과 요가차라(실천)

나의 문파는 ‘해밀문(解密門)’이다. 기존 유식학의 요가차라와는 별개로, 철저하게 실천 수행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요가차라 해밀’이라고 부른다. 해밀의 뜻은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모든 숨겨진 뜻을 일상생활에서 실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언어로 풀어낸다는 의미다.

2. 불성과 참나의 본질: “비었다면 틀릴 게 없잖아”

참나 자체가 비었다라고 전제하면 아무 상관이 없다. ‘모두 비었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나 공통된다는 것을 ‘불성’이라 말하는 것이고, 이 텅 빈 사실이 누구에게나 공통되기에 “완전한 여래(빈 진리 그 자체로부터 오는 자)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석한다면 논리적으로 전혀 틀릴 게 없다.

3. 승의제 ‘공’ 불교의 탁상공론 비판

처음부터 “무안이비설신의” 운운하는 ‘승의제 불교’는 일반 중생의 존재론적 체감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접근을 더 어렵게 만든다. 부처님은 ‘일체는 십이처다’라고 선언했고, ‘일체개고’라며 고통받는 중생의 직접적인 존재론적 차원에서부터, 눈앞에 어른거리는 실제와 같은 감각작용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승의제에 치중한 ‘공’ 불교는 중생의 실생활을 무시하고, 마치 자신들의 입으로 ‘공!’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바로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듯 말을 한다.

여래장설이 참나의 아트만론에만 집착하게 하는 데에 그쳐서, 2차적인 ‘자기 자신도 비었다’에 도달하기가 사실상 거의 도박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게 도박이긴커녕, 자기들은 그렇게 현학적인 철학 불교로 만들어 놓고, 지들은 과연 사람들을 여래장설이 도달하게 하는 1단계의 강력한 삼매 수행에까지라도 도달하게 할 수나 있는가?

4. 참나/여래장 방식의 우수성: “2번 적용의 요령”

여래장을 힌두교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철저하게 ‘공’론 주의자들의 관점으로 프레임질 된 방식에 불과하다. 이 방식의 진짜 우수성은 밖으로 구하지 않고 안으로 구하게 한다는 점이다. 밖을 배격하고 내면으로 들어와 밖이 실체 없이 허물어짐을 경험하고 나면, 똑같은 원리를 마음에 한 번 더 적용한다.

즉, “참나를 열심히 찾아 내면으로 향한 다음, (첫 번째로 닦아낸 삼매의 여력을 모아, 그 강한 저돌력으로, 이내 내면을 관찰하면) 그 참나도 없는 것이구나” 하고 2번 적용하여 금방 깨닫게 하는 탁월한 요령이 있다.

5. 공론주의자들의 모순과 의도적 누락 폭로

웃기는 게, 여래장/참나설의 소의경전은 정작 철저하게 공을 말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공’론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미 소의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라는 점과, ‘본래 없다’ ‘자성이 본래 비어, 그 빈 자성을 보면 견성성불한다’라는 이치를 선불교 모든 곳에서 거듭 천명하고 있음을 누락해선 안 될 일이다.

마음을 관찰하면 시도 때도 없이 오가고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그게 바로 ‘여실지견’이자 불교적 진리인 ‘무상성’이다. 마음을 관찰하여, 실체가 없음을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사실적인 일에 불과할 것인데, 그 마음을 보는 것이 아트만설이며 브라흐만적이라는 주장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스스로 공을 주장하면서도, 이렇게 당연한 마음 관찰을 두고 맥락 고려 없이 무작정 ‘아트만적이다’라고 비판하는 것이 학계에서 어떻게 허용되었는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결어] 어이가 없는 일을 벌이고서 박수박수 짝짝꿍 해봐야 나는 장차 미래제가 다하도록 이들의 견해에는 조금도 긍정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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