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에 있어서는 여전히 같다

어제 삼조 승찬의 신심명을 마쳤으니까, 오늘부터는 사조 도신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을 시작할 것이다.

근데 관련해서 책도 보고, 논문도 2편 봤는데, 대체로 피상적인 문자적 겉핥기만 이루어지고, 그 원리적인 숙련이 없는 내용물들이 보통인 것 같았다.

선어록을 다루면서는, 선문의 종지를 알지 못하고는 다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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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설명들은 사실 다 틀렸다. 어느 부분에 조금 오류가 있는 게 아니라, 취지 자체가 삼천포다.

원문의 “고요함과 산란함에 장애를 받지 아니하면”(불위정란소뇌자)

이건 그 옆에 해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떠난다’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소리이다.

떠나고 끊고, 그게 선문의 종지가 아닌 것이다. 심지어 ‘떠나고’ ‘끊어’서는, 바로 앞에 설명한 보살의 일상一相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두고) 장애받음 없이 자재로이 조율하여 선정과 지혜, 즉 지止와 觀을, 적절히 잘 조율해 사용하는 고로 “좋은 솜씨”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즉시즉시 그 눈 앞 경계(대상, 현상, 환경)에 대해 그침(선정)과 비춤(지혜)을 적절히 조절&배합해가며 사용해 매 순간 적절한 해탈법을 구사하는 그 ‘노하우’를 <마음 잘 쓴다>(용심한다)하는 것이다.)

“곧 훌륭한 선禪으로 용심用心하는 사람이다”(즉시호선용심인)

이 말은 선으로(=선법에 비추어, 선리를 따라) 용심 하는(=마음 쓰는) 일에 “좋은 솜씨”이니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고작 경문에 글자로 써있는대로 ‘떠나고 여의고 끊고’ 하며 용빼고 호들갑 떠는 솜씨가 아니라, ‘그대로 눈 앞에 두고’ 스스로 판단해 조율하며 여유롭게 대처하는 ‘좋은 솜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살의 일상(一相) 반야’인 것이다.

그러니 “수선에는 산란함을 떠나야 하나, 그렇다고 고요함을 취하려고 하면 이 또한 장애가 된다.” 이런 본문의 말이, 얼마나 어긋난 말이겠는가? ‘선문의 종지’를 얼마나 흐리는 말인지 말이다. 애초에 보살이 성취하는 일상一相을 설명하고 이 구절이 나오고 있는데, 일상一相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낮은 해설이 되는 것이다. (앞페이지의 그 일상 부분도 선종의 종취를 짐작도 못하고선, 적당히 노장철학 유사한 문장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일상이라는 것은, 이미 떠날 산란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산란함과 고요함이 모두 일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산란함을 떠나야하고 고용함을 취해선 안되고, 아니, 애초부터 선문의 종지가 떠나고 어쩌고 ‘그런게 아니기에’ 도신이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 글)을 써야 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인용한 법화경 구절의 의미도, 인용 의도(앞의 구절과 맥락을 함께하는)를 전혀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불佛은 대승에 자재自在하여 그 얻은 바의 법 그대로 정혜력(定慧力)으로 장엄하나니, 이로써 중생을 제도한다.” (불자재대승 여기소득법 정혜력장엄 이차도중생)

그 구절은 그런 말이 전혀 아니다. 특히나 오른쪽 페이지의 해설은, 아주 완전히 다 틀렸다. 그냥 엑스표.

인용한 법화경 그 구절은 이런 의미이다.

“부처는 자재로이 대승에 노닌다. (그 노니는 방식이 어떠하냐면), (如, like, ~처럼, 예를 들어 말하자면 약간 이런 식이다) 주어지는 상황과 현상, 눈 앞에 있는 경계들, 대상들, 있는 그것들 그대로를 그대로 선정과 지혜의 힘을 적절히 조절해 사용하여, 그대로 장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이 자재로이 이와같이 주어진 (속제) 그대로를 ‘법계의 장엄(=승의제)’으로 만드는 고로, 마찬가지로 그러한 방식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중생을 있는 그대로 부처로 만드는 방식으로, (한 중생도 없게) 모두 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가 “자재로이 노니닌다”> 함이며, 이것이 <대승, 즉 큰 수레의, 방식>인 것이다.” (주어진 대상이, 그 대상인체로, 불의 정혜력으로 인해, 그대로 장엄케되는 것처럼, 주어진 중생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불의 정혜력으로 인해. 그게 ‘부처'(깨달음)가 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걸 다시 정리해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다.

“부처는 다만 선정과 지혜를 조절해 일상一相을 볼 뿐이고, 다만 일상一相을 보기에 염법染法이 곧 그대로 정법淨法으로 장엄된다. 왜냐면 일상一相이 곧 불구부정不垢不淨 하기 때문이다. 즉, 염정을 나눠 염을 물리고 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인연을 따라 과보를 받으며 생사윤회하는 것이고, 또 그렇다고 ‘염은 멀리하는데 정은 또 취하지 않고’, 이런 어불성설의 오락가락 하는 태도는 ‘근본 종취’에 있어서는 헛소리고, 그런 게, 다 아니라), 염/정에 즉하여 그 둘이 ‘모두 공하여’ 즉시에 해탈하여 불구부정으로 가는 것이 ‘정법淨法 위의 정법淨法’이기 때문이다(이렇게 보는 순간, 이러한 ‘정법 위의 정법’을 통해, 속된 법계가 즉시 일상(=공상)의 장엄 법계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법계 안에서 부처가 반연하는 대상은, 주체가 대상을 반연하여 윤회의 인연상을 내는 그런 흔한 중생심의 반연이 아니라, <안의 일상一相에 의거하여>, <대상을 끌어당겨 일상一相에 인연시키는>, 해탈의 반연, 환멸연기적 반연이어서, 그로인해 주어지는 환경, 취하는 경계가(기소득법이) 모두 “장엄케”(정법淨法 위의 정법淨法으로서)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정견”으로부터 충분한 정사유를 발휘해 ‘세상’과 관계되는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점> 8정도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한 방식으로 중생을 대할 때, 중생도 중생 그대로가 그대로 부처로 장엄되며, 방편이나 시간을 빌리지 않고, 부처의 정혜력(=법력)에 의거해, 즉시 제도되어, 그대로 부처가 되니, 이것을 일컬어 <부처께서는 대승의 큰 수레에 자재로이 노니신다>(불자재대승)라고 말한다.”

이런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

세간의 눈 그대로를 적용시켜

무엇을 떠나고, 무엇이 산란하고, 뇌란되지 말아야 하고,

아니, 완전 ‘아니올씨다’ 이다.

도신이 고작 덧셈뺄셈 수준도 못 넘은 그런 초등수준의 말을 하기 위해 글을 썼겠는가? 선문의 조사가 우습냐 이 말이다. ‘문자에는 진리가 없다’ 며 글을 거의 남기지 않는 선사가, 굳이 필설을 들어 그런 초등 1년생 못 미칠 수준의 말을, 굳이 경전까지 인용해가며 저술을 했겠냔 말이다.

때문에 그 글을 이렇게 번역하고 이렇게 해설을 하면, 사실 점수로도, A학점 B학점 C학점… 아니 아예 학점이 나올 수 없게 그냥 빵점이다.

이미 들은 정견을, 충분히 정사유하여, 끝까지 반복해서 무한급수적으로 적용해야 ‘선문의 종취’에 도달하는 것이다. (스스로 앞에서 세운 전제(모두 공하다)를, 뒤에서 안 맞는 얘기(떠나고, 취하지 말고, 어쩌고,)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적당히 적용하다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하는 식으로, (갑자기 전혀 별도의 동떨어진 소리를 하기 시작하며), 일통되지 못하는 지점이 나오면, 거기서부터 다시 퇴전하여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때문에 ‘정사유’가 정견 다음으로 팔정도의 2번째인 것이다. 선종은 이처럼 즉 ‘정사유'(혹은 바른 관찰 누적)의 ‘충분한 충실성’을 강조하는 견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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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외에 봤던 논문은, 서술된 문자 자체에는 흠이 없으나, 그 서술된 문장이 덧셈 뺄셈이어서, 곱셈을 물으면 알지 못할 것 같은 의혹이 있다. 왜냐면 (당연히 나왔어야 할) 곱셈 부분을, 아주 작은 단초라도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5년 10월 26일 일요일 오전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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