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성 없음과 아나아트만

나같은 이상한 사람도 스타일로서는 원본성을 주장할 수가 없는 게,

다 어디서 따온 스타일들이기 때문이다.

선수행을 배운 것은 나 화두 주신 주지스님에게서 온 것이며
염불하고 여러 종교들을 두루 회통하는 것은 청화스님에게서
그리고 선어록들을 곁눈질하며 ‘막말하는 가풍’을 <독학>했다.

물론 막말에 선종의 종체가 있는 것은 아닌데

내가 적당히 그 외양만 베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론한 사람들을 ‘이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게

그냥 내가 곁눈질하여 따라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었다고 할 수는 없는 동시에, 나 스스로가 나의 원본이라 주장할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내 기질에 <구미가 당기는 것>을 씹어 삼켜 소화해, ‘내’가 되었을 것이긴 하다.

그러한 기질 부분은 나 자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적당히 베끼고 차용했음을 숨길 수는 없다.

누구나 저마다 원본이 되는 길은 아주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나처럼 이상한 사람도, 내가 원본이 아닌 것이다.

해체되고 조립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해체와 조립이 된다는 말은, 실체가 없이 인연을 따른다는 것이다.

주어진 것을 적당히 잘 조합해 내는 정도인 것이다.

마치 우리 세포가, 우리가 먹은 것을 적당히, 그 분자들을 잘 해체하고 조합해 자기 살점으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지구라는 암석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온갖 분자들을 통해 구성되어 있는데, 그런 유기화학적 결합이 처음 40억년 전에 시작되어, 40억년 동안이나 여러 조합을 쉬지 않고 시도한 끝에, 나 같은 것이 된 것이다.

그러면 나의 지분은 나에게 있다기 보다는, 사실은 그 수많은 조합을 해 온 세상 자체에 있다. 그냥 나는 세상의 덩어리 일부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먹지 않으면 세포가 살점을 조합해낼 아무런 ‘꺼리’가 없듯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그 세계가 결합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것이 존재할 아무런 ‘꺼리’가 없는 것이 된다. 나는 나 스스로는 나를 만들어낼 아무런 꺼리를 갖지 못한다. 나를 구성하는 구성성분은, 물질에서 정신에 이르기까지, 전부 어딘가에서 복사되고, 세계로부터 주어지고 받은 것이다. 그 탓에 내 맘대로 내 삶을 구성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주재성 없음(스스로 할 수도 없고)과 자재성 없음(이러한 제한 밖으로 벗어날 수도 없다)을 직시하면, 그것이 흰두적 아트만론을 극복한 불교의 무아관이 된다. (영원성이 없는 것은 당연히 누구나 아는 것이고.)

이렇게 무아관이 굉장히 답답한 것으로 비춰질 여지도 있지만, 실상으로는, 스스로 하지 않는데도 이렇게 이루어져 왔고,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데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좀 더 안심하고 살아도 좋다는 것이다. 다 짊어지고 다 스스로 통제하고 개척하려 하지 말고,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지혜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더라도 늘 하는 바가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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