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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 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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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은 서원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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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불승주의1 – 오직 일불승만 있을 뿐

전체 목차
kaohsiung, temple, lanterns, red lanterns, chinese lanterns, old, traditional, art, colorful, culture, ancient, spirituality, buddhism, heritage, religion, tradition, oriental, taiwan, lunar new year, taiwan, taiwan, taiwan, taiwan, taiwan

설일체유부가 설일체유부라고 불리는 것은, 그 비판자들의 학설에 의해서이다. ‘쟤네좀 봐. 불교인데 ‘있다’고 하는 게 말이 돼?’ 하고 ‘너네는 <유부>야’ 하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유식학파가 유식학파로 불리는 것도 사실은 그와 마찬가지이다. 유식학파는 사실 스스로를 ‘요가행파'(Yogacara, 요가차라)라고 불렀고, 이는 사실은 논리 대결보다는 실참 수행(요가행)을 중시한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비판자들은 ‘쟤네좀 봐. 존재하는 게 전부 ‘식’이래.’ ‘유부는 5위 75법을 말하며 75법은 실제로 존재하는 거라더니, 얘네는 왠걸 5위 100법을 말하네? 결국 똑같은 거 아냐?’ 이런 모든 의미를 담아 ‘쟤네는 식이 존재한다고 하는 놈들'(예전에는 법이 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식이 유일하게 있다고 하네)이라는 의미로 ‘유식학파’라고 불렀던 것이다. (물론 유식의 유는 있을 유가 아니라, 유일하다 할 때의 오직 유 이다.)

마치 서양철학에서 경험론자들이, 자신들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일련의 철학자들을 엉성하게 묶어 ‘관념론’이라 지칭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걸 알아야 한다. 불교의 도달 목표는 다만 ‘무분별지’라는 것을 말이다. 유심유사, 무심유사, 무심무사의 단계를 차근차근 거치든 단박에 뛰어넘든, 최종적으로 ‘무분별지’에 들어서면, 그것으로 불교의 용도는 다한다.

나는 동아시아 말단의 불교 애호가 답게, ‘일불승주의자’인 셈이다. ‘하나의 부처되는 수레’가 있을 뿐이며, 교설간의 우열은 없다는 것이다. 우열을 나누려 하는 견해야말로 지극히 유루지의 발로여서, 그것이 오히려 불교와 매우 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대승기신론은 도입부에 이런 자문자답으로 시작한다.

『문: 이미 수다라(경문) 중에 대승의 법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논을 또 지었는가?

답: 이미 수다라 중에 대승의 법이 다 갖추어져 있지만, 중생의 근기와 수행의 차도가 서로 다 같지 아니한 까닭에,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조건이 서로 차별상을 그리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계실 때는 (중략) 등 하여, 논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라면,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많이 듣고 스스로 추론하여 이해를 얻는 중생일 수도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 스스로 추론하여 이해를 얻는 중생일 수도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스스로는 추론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넓게 그 뜻을 논으로 풀이한 것을 통하여 알아듣는 중생일 수도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넓게 풀이한 논이 문장이 많은 것을 번거롭게 여겨, 적은 문장으로 된 ‘총집약 논서’가 (은근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마음으로 내심 즐겁게 여기며, 추론하여 이해를 얻어내는 중생일 수도 있다.

이와같이 이 논서는 (그 중에 4번째 로서),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가르침의 한량없는 뜻을, (짧게) ‘총집약하는 것’을 목표하였기에, 응당 쓰여지게 된 것이다.』

즉,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일불승주의’는, 이같은 태도를 모든 교설에 적용하는 것이다.

아함부의 경전들을 보라. 단지 색수상행식 5온에 대한 관찰만으로도, 약욕자증 즉능자증하여, 스스로 깨달음 선언을 하고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후대의 대승 학설은, 크나큰 논리적 결핍의 부분이 있는데, 자기 스스로 인무아인 즉 법무아라고 설명하면서도, 소승의 이론을 따라 ‘인무아’가 된 아라한이 ‘법무아는 아닌 줄로’ 착각을 한다. 그런데 인무아라면 필경 법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주관이 없이 성립되는 객관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대승의 일관된 학설이라면, 소승의 아라한이 인무아를 성취하는 순간, 당연히 법무아도 성취되고 있음을 눈 밝은 자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예시로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간화선을 주된 수행 방편으로 삼는 선불교 내에서도, 때때로 많은 선사들이 ‘염불’을 권하고는 한다. 염불을 하면서는 당연히 ‘극락왕생원’을 세우고 염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복도 빌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당연하게도 선불교에서는 육조의 가풍을 따라 ‘자성미타 유심정토’사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극락이 존재한다고, 가라고, 염불 하라고, 해놓고는, 정작 내부적으로는 ‘우리 본성이 아미타 부처요, 이 마음이 극락 정토다’하고, 극락이고 아미타불이고 없다 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말 아닌가?

여러분들은 설일체유부가 ‘삼세실유 법체항유’라고 말하는 것이, 꼭 이 ‘아미타불 염불’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가의 염불법은 반드시 그 끝에 가서, ‘계속 염불을 하다 보면 어느날 온 세상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때 <그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가?> 하고 살펴야 한다. 그러면 곧 크게 밝아져 도와 계합된다.’ 이런 식의 설명으로 끝이 난다.

이런 염불 수행 과정의 의미해 대해 고찰해 알아야 한다. 인세의 고통이 강렬한 만큼 극락왕생의 마음도 간절할 것이다. 그 간절함으로 염불삼매를 성취한 후에, 염불 소리가 세상에 가득해지면, ‘이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고?’하고 그때까지 닦아온 삼매의 힘으로 비추어 들어가, 즉시에 ‘본래무일물’임을 확인하고는, 일시에 도와 계합하여, 다시는 미혹치 않게 하는 수행 과정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좌부에서 ‘5위 75법’이 있으니, 이것은 진실된 법이며, 따라서 이것을 관찰하여 도에 들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75법 중 어느 주제를 놓고 관찰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관찰하여 ‘무상, 고, 공, 무아’임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심해탈하고 증득하여 아라한이 될 수 있으며, 아라한이 되는 순간 인무아를 성취하는 고로, 주객의 연기쌍에서 주가 탈락되는 고로, 자연 객도 종적을 감춤을 알아야 한다.

아미타불이 실지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염불을 닦음과, 5위 75법을 말하며, ‘바른 관찰’을 해나가는 것이, 결국 같은 행위들인 것이다.

완전히 다른 형상을 갖춘 염불법과 아함부의 학설이 이와같이 일치한다면, 결국 나머지 교설이 일치하게 됨은 명약관화 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와같은 ‘일불승주의’를 말한다.

불교에 수레는 ‘하나의 부처되는 수레’ 이것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불교가 설명적 진리가 아니라 수단적 진리임을 망각하면, 있다고 하는 것과 없다고 하는 것이 자꾸만 싸우게 되는데, 이는 모두 실은 불법과는 멀다.

(있다고 하는 것도 법이요, 없다고 하는 것도 법인데, ‘저긴 있는데 여긴 없다’커니 하며 법을 세우는 순간, 거기서부터 이미 소승의 인무아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교설이 존재한다면 그 교설은 자기모순적이다. 불타의 교설과 굉장히 멀다.)

추가

+ 아함부에서는 만법이 다만 오온, 혹은 십이처, 혹은 십팔계, 라고 설명을 한다. 유식은 다만 그걸 모아, 즉 ‘오온 혹은 십이처 혹은 십팔계’라 하던 것을 번잡하게 여겨 ‘다만 식’으로 집약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오온의 무상 고 공 비아를 관찰함과, 식의 무상 고 공 비아를 관찰함이, 행위로서는 동일한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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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불승주의1 – 오직 일불승만 있을 뿐” 에 하나의 답글

  1. 아함부에서는 만법이 다만 오온, 혹은 십이처, 혹은 십팔계, 라고 설명을 한다. 유식은 다만 그걸 모아, 즉 ‘오온 혹은 십이처 혹은 십팔계’라 하던 것을 번잡하게 여겨 ‘다만 식’으로 집약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오온의 무상 고 공 비아를 관찰함과, 식의 무상 고 공 비아를 관찰함이, 행위로서는 동일한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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