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까 나는 반야심경 하나 들고 간화선(화두참구) 닦아서 유식과 같은 결론에 들어섰는데,
의외로 많은 불교학자들이, 그런 ‘비춤’과 ‘닦음’에 대한 경험 없이, 그냥 써져 있는 말만 읽고서 자기 기호대로 선호 분별을 해서 개념적 파악으로 불교 교리의 수승함과 하열함을 나누고 있다는 게 좀 한심스럽게 느껴져서 요며칠 자꾸 한숨이 나오네..
막상 실제로 해보면, 내가 반야심경 나침반 들고서, 간화선법의 방식으로 대신심/대의심/대분심을 발휘해 비춰 들어가 도달한 ‘어떤 상태’에,
내가 막상 해보니까, 염불을 해도 똑같이 들어가지고, 능엄주나 광명진언 같은 주문을 외워도 똑같이 들어가지고,
심지어는 개종해서 기독교 장로 교단 교회에 나가 설교말씀 듣고 새벽기도 다니며 ‘오 주여..’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들어가지더란 말이지.
그래서 그런 수행 경험들과, 요령-노하우-들이 쌓이고 나니까, 이제는 그냥 특별한 방편적 수단을 빌릴 필요가 없이, 그냥 묵묵히 담담히 제 자리를 비추기만 하면 그것으로 수행은 저절로 닦여져 나가는, 그런 지경이 됐단 말이지.
경이나 논에는 구구하게 말이 많지만, 정작 수행을 닦아 들어갈 때는, 구구한 말도 다 필요 없고, 아무 방편도 필요 없고, 그냥 ‘담담히 비출 뿐’ 이거 하나로 그냥 들어가진단 말임. 그것으로 그냥 도가 나아가 지고.
물론 나아가진다고 해서 어디로 가는 게 아냐. 그냥 그 한 자리에 푹 쉰 김치독마냥 제 자리에서 푹 익어 들어가지는 거지.
심지어 학자들이 유식의 2분설 3분설 4분설 같은 걸로도 위/아래를 습성적으로 나누려 하던데, 나는 거기서 좀 ‘아니 이 사람들이 좀 모자란 사람들인가?’하는 생각마져 들었음.
2개로 간단하게 나누더라도, 거기에 3,4단계는 다 함축되어 있는 거고, 4개가 가장 좋다 해봐야, 나누려면 100단계로도 나눌 수 있단 말임. 4계가 가장 자세해서 좋으면 아예 100개로 나누지 왜 4개에서 멈춰?
그 2,3,4는 필연적인 어떤 게 아니라, 음식 할 때 간이 싱거우면 좀 더 넣고, 짜면 물 더 붓고 이런 문제란 말이지. 막상 비춰 들어가 보면, 그냥 요령껏 터득해서 지나가는 문제지, 설시해서 고정해 놓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무슨 도로교통법이 아니란 말임.
예를 들어 3분설은 자증분에서 끝나고, 4분설은 다시 그 자증분을 깨닫는 ‘증-자증분’을 덧붙인 거거든. 근데 사실 그렇게 치면, 증자증분을 깨닫는 증증자증분, 증증자증분을 깨닫는 증증증자증분, 이렇게 무한히 100단계까지 붙일 수도 있음. 이게 웃기는 거란 말이지. 이걸 우열의 문제로 파악하면 우스워진다는 거야.
사실 자증분이라고만 해놓더라도, 그 ‘자증분’이라는 글자 자체도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거든. ‘부처’라고 쓰여 있다고 해서, 부처되고 죽고 끝나는 게 아니야. ‘아라한’이라고 쓰여 있다고 해도, 그 아라한이 무학이라고 해서, 무학이라는 말이, 고정되어, 죽은 돌멩이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깨달음이 매 순간 반복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깨달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태라서, 그래서 부처고 아라한이고 무학이란 말이지.
즉, 부처라는 글자, 아라한이라는 글자는, 계속 변화하고 있는, 활발발한 깨달음이 작동하는, 굉장히 강력한 역동성을 떠올려야 하는 말이란 말이지.
자증분도 마찬가지야. 행여 4분설로 말한다 하더라도, ‘증자증분’해서 깨닫는 내용이 뭐야? ‘자증분’이야. 자증분을 깨달아서 증자증분인데, 그 깨달은 내용은 결국 자증분이라고. 그럼 자증분 내에서 끝내도, 막상 수행에 들어가 닦을 때에는, ‘증자증분’이라는 말이 안 적혀 있다고 해서, 원리상으로 막히는 부분이 아니라고. 그냥 닦아 비추면, 자증분에 대한 깨달음도 당연히 일어난단 말이지. 그 ‘네 글자 글씨’ 없다고 안 일어나는 부분이 아니라는 거야 그 부분이.
물론 이제 직접 거기까지 닦아 들어가 그 부분을 확인해 볼 생각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글자가 있고 없고가 마치 유/무의 문제가 돼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제로는 마치 공사장 인부가, 시멘트와 물을 섞을 때에, 반드시 오른쪽으로 2번 돌리고 왼쪽으로 2번 돌리고, 이런 규칙 없이도 막상 해보면 그냥 경험대로 슥슥 섞어서 갖다 부으면 되는 것과 같은 문제라는 거임. 어떻게 섞긴 뭘 어떻게 섞어, 그냥 대충 이렇게 섞는 거지. 물 비율만 대강 맞춰다가.
무상유식이라 하든, 유상유식이라 하든, 그것 역시도,
마치 이런 거임.
기성 세대는 요즘 애들이 남침/북침 헷갈려 하니까, 6.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도 모른다고 경악을 하지만, 사실 말이야 만들기 나름 아님? 요즘 애들 입장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있는 세상인데, ‘북한이 침략했으니 북침’이라 표현할 수도 있고, ‘북한이 남쪽으로 침략했으니 남침’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건 그냥 말 만들고 갖다 붙이기 나름일뿐이라는 거지. 단순히 북침/남침 그 단어가 헷갈리는 거 자체는, 그냥 사실을 알고 모르고와 무관할 수 있다는 거임.
무상유식/유상유식도 결국 ‘그런 거’임. 불교가 ‘수단적 진리’라는 점을 항시 망각하지 말아야 하고, 관법을 일으켜서 빨리 해탈하게 하는 ‘효과성’의 측면으로 그 교설도 평가되는 거지, ‘사실을 잘 설명합네’ << 이런 소리 하고 있으면, 진짜 ‘그게’ 바로 불교가 태생에서부터 비판하는 ‘제 눈에 안경’이라는 점을 모르고, 기초적인 원리도 지키지 못하고 말을 하는 게 됨.
아니 ‘네 눈’에는 ‘네가 그렇다 한 대로’ 보이겠지. 그 기호에 따라 1분설, 2분설, 3분설, 4분설 가운데 ‘뭐가 제일 맞다’ 선택이나 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 그 4개 설 전부가 잘못돼다 지적하는 변계소집(망집)이라는 거임. 그니까, 써져 있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고르고 있다는 게 반증되는 거임. 그걸 그 중에 골라서 ‘이게 더 맞겠다’ 하고 추측하는 순간에, 거기서 유전연기가 확 튀어나와서 노사우비고뇌를 낳고 있는 거란 말임.
그니까… 엉성해! 너무 엉성하다고!! 불교의 앞/뒤를 맞추지 못하고 선택만 신나게 해봐야 안 맞는다고. 아구가 하나도 안 맞아.
그니까 이런 문제라는 거임.
그런 세세하게 나누는 거 필요 없이, 그냥 요령 금방 터득해서 5온, 12처, 18계가 결국에는 식으로 돌아가는구나, 즉, 온 세상에 대한 비춤이, 결국에는 ‘비춤에 대한 비춤’으로까지 소급해 들어가는구나, 쉽게 말해 선문에서 말하듯 ‘만법귀일이면, 일귀 하처요?'(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하는 화두처럼, ‘식’으로 귀일하여, ‘비춤에 대한 비춤’을 일으키는 지경에 가면, ‘이 비춤은 다 어디에서 오는가?’하고 궁구하여 들어가서, ‘본래무일물’임을, 즉, 식도 또한 ‘이숙식’임을, 요별하여 마치고, 우리 의식 안에 ‘실체적 아’ 혹은 ‘실체적 유’란 단 하나도 없었음, 을 요별하여 마치는 것이, 유식의 결론이고, 반야공관의 완성이란 말임.
그럼 그냥 ‘담담히 비추면 그만일텐데?’ 하고 요령 뛰어난 사람은 1분설만 갖고도 그냥 그 깊숙히까지 다 들어가 버린다고.
(사실은 ‘세상에 대한 비춤’과 ‘비춤에 대한 비춤’ 이런 것도, 대승에 와서, 속세인들이 불교 수행을 해대니까 설명이 필요해진 말이지, 초기 당시처럼 삭발 출가해서, 독처한거하며 전정사유 하는 동안에는, 그냥 그 ‘전정사유'(온 몰입의 깊은 사유기간을 갖는 것)만으로, 출가자들이 다 저절로 지나쳐 들어갔을 부분일 거라는 말임. 오온을 비추다 보면 저절로 깊어져서, 그 비춤을 비추는 지경에, 그리고 더 나아가 ‘아 뭣도 없구나’ 하는 지경에까지, 그냥 신심 깊은 출가 수행자들이 저절로 익어져서 각자각자 자기 요령대로 어떤 방식이든 상관 없이, 대부분이 일률적으로 들어갔을 지경이라는 거임. 유식이 특별히 말을 꺼내온 게 아니라, 비춰보면 ‘아 이게 다른 길이 없겠다’ 싶은 부분이라는 말임.) (우린 신심 없어서 신가비가출가(信家非家出家)도 안 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설명과 요령에 대한 꿀팁들이 필요한 것일 뿐이고. 예를 들어, 삼론종이라고 하더라도, 속세인들에게 설명해야 하니까 공가중이 교설로서 성립하는 거지, 초기에, 세속을 끊고 출가한 사람들에게 공가중이 왜 필요했겠냐고. 그냥 일정처에 틀어박혀서 전정사유 하면 그만인데 ‘가’라는 개념을 굳이 들어서 세상일 뭐다 뭐다 설명을 뭐하러 해. 거기다 필요도 없는 그런 설명 하고 있는 사람이 우스워지지. 그래서 부처도 그런 소리 안 했지. 아함경 앞부분에 봐봐. 일시불주사위국기수급고독원, 유이비구래예불소, 백불언. 출가승이 부처에게 묻고, 부처가 출가승에게 답하는데, 뭔 필요가 있겠냐고 공가중이. 대승이라 비출가 수행자가 생기면 그에 맞춰 공-가-중 같은 소리들이 왕왕 필요하고, 유행하게 되는 거지.)
결국 그게 그 개별 중생의 재능과 근기따라 필요한 가르침이 나뉘는 것이지, 그 교설 사이에 우열이 없단 말이지. 1분설, 오케 1분설로는 안 될 수도 있어. 너무 간략하니까. 근데 2분설, 2분설도 사실 충분해. 근데 3분설. 오케이 3분설도 좋지. 그럼 4분설? 그래 뭐 4분설도 좋다 이거야. 근데 여기서, 1분설은 틀렸고 4분설이 옳다 하면, 거기서부터는 왜? 아예 100분설로 나누지? 하고, ‘반드시 4분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견해는 사실상 100분설이라고 필요 없다는 장담을 못해. 그리고 그 정도로 둔재인 자는, 그 자는 그 4분설이 필요한 단계에도 못 들어가는, 심각한 둔재여서, 유식학설 자체가 그 사람과 인연 안 맞는 수행, 인연 안 맞는 교설이 되는 거란 말임. 바보들이냐고? 만법귀일도 못 보는데, 일귀하처를 4개로 따지는 학설을 가르쳐봐야, 그 사람이 그걸 뭐에 써먹겠냐고? 아예 다른 더 쉽고 빠른 수행법 알려줘서 비춤과 그침을 터득하게 해야지!
왜, 붓다고사의 법구경 주석(법구의석), 그리고 자타카, 니까야, 테라가타에서 줄줄이 증언하길 줄라빤타까가 ‘라조하라낭!(먼지를 깨끗이!)’ 만 갖고도 아라한이 됐다매. 근데 왜 거기서 ‘4분설이 최고’가 나와야 하겠냐고. 그게 뭐가 최고인데? 어려운 철학이라도 하는 척, 인연상에 대해 줄줄이 읊다가, 정작 ‘그 교설’이 ‘어떤 중생’과 만나 인연화합을 이룰 지에 대해서는 왜 ‘아무 고려를’ 못 하는 건데?
그니까 선사들이 이런 경우에 늘 ‘이 칠통아!’ 했던 거란 말임.
그거 고작 분별해서 이게 더 좋니 저게 더 좋니 하고 있으면 ‘이 여우귀신같은 놈아!’ 하고 호통 치고.
그니까 여기까지 가고 나면,
그런 부분들에서 ‘평생을 자기가 밥 먹고 살고 연구한 분야에 대해서, 왜 나만큼 진지하게 실제로 닦아보질 않았지?’ 라는 의구심이 계속 드는 거야. 왜 그렇지? 뭐가, 어느 부분이 문제인 거지?
아니 삼계해탈을 말하는 종교에서, 삼계해탈이라는 전제를 빼놓고, 실제 해탈에 대해 효과성이 어떠한지에 대한 기준이 아니라, 다른 자기 취미와 기호를 기준으로, 그 교리 평가를 하고 있으면, 아니 그게 맞겠냐고?
그니까, 그 개개인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나도 이제 불교에서 내게 받은 게 있는 만큼, 내게서 꺼내서 줘야 한단 말이지. 근데 충분히 아는 사람도 ‘이 정도 수준’에 그친다면, 어느 수준에 맞춰서 어떤 얘기들을 해야 할지가, 그걸 내가 정할 수가, 거기가 아리송해져 버리는 거야.
아니 씨… 대중은 모른다고 쳐. 근데 평생 그 글귀를 붙잡고 산 사람들이, 왜 이렇게 그걸 분별을 못하지? 진짜 ‘글자로만 봤다’는 게 너무 느껴져서 짜증이 나 내가.
비추려거든 그냥 담담히 이렇게 비추면 그만인데. 어떻게 여기로 끌어올지 고민이 머리가 너무 아파져.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너무 실타~ 아 물론 불조들은 다들 자비심을 가지라 했지만, 나는 그릇이 작아서 그냥 화가 나~ 열이 받아!
+ (사실은 ‘세상에 대한 비춤’과 ‘비춤에 대한 비춤’ 이런 것도, 대승에 와서, 속세인들이 불교 수행을 해대니까 설명이 필요해진 말이지, 초기 당시처럼 삭발 출가해서, 독처한거하며 전정사유 하는 동안에는, 그냥 그 ‘전정사유'(온 몰입의 깊은 사유기간을 갖는 것)만으로, 출가자들이 다 저절로 지나쳐 들어갔을 부분일 거라는 말임. 오온을 비추다 보면 저절로 깊어져서, 그 비춤을 비추는 지경에, 그리고 더 나아가 ‘아 뭣도 없구나’ 하는 지경에까지, 그냥 신심 깊은 출가 수행자들이 저절로 익어져서 각자각자 자기 요령대로 어떤 방식이든 상관 없이, 대부분이 일률적으로 들어갔을 지경이라는 거임. 유식이 특별히 말을 꺼내온 게 아니라, 비춰보면 ‘아 이게 다른 길이 없겠다’ 싶은 부분이라는 말임.) (우린 신심 없어서 출가도 안 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것일 뿐이고.)
++ (우린 신심 없어서 신가비가출가(信家非家出家)도 안 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설명과 요령에 대한 꿀팁들이 필요한 것일 뿐이고. 예를 들어, 삼론종이라고 하더라도, 속세인들에게 설명해야 하니까 공가중이 교설로서 성립하는 거지, 초기에, 세속을 끊고 출가한 사람들에게 공가중이 왜 필요했겠냐고. 그냥 일정처에 틀어박혀서 전정사유 하면 그만인데 ‘가’라는 개념을 굳이 들어서 세상일 뭐다 뭐다 설명을 뭐하러 해. 거기다 필요도 없는 그런 설명 하고 있는 사람이 우스워지지. 그래서 부처도 그런 소리 안 했지. 아함경 앞부분에 봐봐. 일시불주사위국기수급고독원, 유이비구래예불소, 백불언. 출가승이 부처에게 묻고, 부처가 출가승에게 답하는데, 뭔 필요가 있겠냐고 공가중이. 대승이라 비출가 수행자가 생기면 그에 맞춰 공-가-중 같은 소리들이 왕왕 필요하고, 유행하게 되는 거지. 교설 자체도 이미 연기법적인 건데, 그걸 모르고 이게 최고 저게 최고 하면서, 자신이 ‘연기법을 안다’ 생각하면, 아이고 두야. 보는 사람 민망한 소리가 왕왕 펼쳐지고 있는 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