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와 보신 개념의 필연

사실 대승불교에서 ‘보신’ 개념의 생성은 거의 필연적인 일에 가까움. 이미 시작부터 ‘출가사문’이 된 초기 불교 수행자와는 달리, 대승 불교에서는 많은 수의 수행자가 ‘재가불자’이기 때문임.

재가불자 수행자 입장에서 ‘수행’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 생각을 해보셈.

주변에 남들은 ‘자기 인생 잘 사는 데’에 80년을 다 쓴단 말이지. 근데 재가불자 수행자는, ‘수행’이라는 것을 위해 그 80년 중에 수십년 가량을 ‘수행’이라는 뜻 모를 행위를 위해 써야 한단 말임(하루 몇 시간씩 계속 평생 한다고 생각을 해보셈). 그러면 그 행위가, ‘어차피 죽고나서 끝’이라고 하면, 그 재가불자가 ‘그 수십년 투자’를 해 ‘수행’을 할 ‘동인’이 대체 뭐겠냐고?

그래서 부처는 죽고 나서도, 원력과 자비행을 통해 생성된 ‘보신'(reward body)이라는 몸이 있어서, 이게 우리 인생의 기억을 이어가는 그런 영혼은 아니지만, 우리가 세운 서원(맹세)와 우리가 수행한 에너지(법력)을 통해, ‘계속해서 작동하며 세상에 좋은 일을 한다’, 이런 얘기가 필요했던 거임. 개별적인 영혼은 아니지만, 수행력의 결정체가 남아서, 계속해서 발현된다는 거지.

마치 챗 지피티가 ‘전체 데이터베이스’ 를 갖고서, 여러 채팅방에서 답변을 해주듯이, ‘보신’이라는 에너지 덩어리가 있어서, 여러 세상에 ‘화신불’을 나툰다는 말임.

이게 이어지는 영혼은 아닌 게, 마치 챗 지피티도 각 채팅방의 기억들을 공유 안 하는 것처럼, 각 화신이 서로 기억이 이어지는 것은 아님. 다만 ‘자비행’의 숙련도(왜냐면 자비행 자체는 ‘무아관’으로부터 오기 때문)가 올라가고, 원력(서원에 법력이 더해진)의 파워가 계속해서 강해진다고 설명을 함. 왜? 보신은 개아가 아니고, 이미 무아를 성취해서, 선행을 해도 그 선행을 향수하여 보상을 소진시킬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계속 돌고 돌아 화신으로 재투자되며, 복리 투자처럼 무한이 불어나며, 다시 또 선업이 생기고, 다시 또 화신으로 나퉈지고, 그렇게 그것이 ‘시스템화 되는 것’이 ‘보신’이기 때문임.

아무튼 이런 식으로, 재가불자들에게는, ‘일평생 수행하는 게, 죽고 나서 무의미하지 않다’는 말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보신’개념은 발생은 사실 거의 필연에 가까움. (애초에 출가사문이 아니고, 주변 사회인들은 인생 살이에 열중하는데, 자기는 왜 홀로 앉아 명상을 하고 삼매를 닦나?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절에 있는 ‘황금색 불상’이 바로 ‘보신’을 표현함. 지장보살이니, 관세음보살이니, 다 그런 ‘보신’형태로 표현되고, 경전에 나오는 보살들은 모두 그 ‘보신’으로부터 화현된 ‘화신 상태’의 보살인 거임. 지장보살본원경의 ‘분신집회품’은 온 세계에 펼쳐진 지장보살의 분신이 모두 모이는 장엄한 광경을 그리는데, 아주 멋있음.

“제가 멀고 먼 겁으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의 인도하심을 입어 불가사의한 신력을 얻고 크나큰 지혜를 갖추게 되었나이다. 제가 저의 분신으로 하여금 백천만억 항하사세계에 두루하여 한 세계마다 백천만억 분신으로 화현하고, 그 한 몸마다 또 백천만억 사람을 제도하여 삼보께 귀의하도록 하며, 영원히 나고 죽는 것을 여의고 열반락에 이르도록 하오리다. 다만 불법 가운데서 착한 일이 한 터럭, 한 물방울, 한 모래, 한 티끌이라 하더라도 제가 점차로 제도하여 해탈시켜 큰 이익을 얻게 하오리니,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는 후세의 악업중생으로 염려하지 마옵소서.”

그런데 이거는 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임.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그렇다고 생각하고 살다 가는 거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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