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담마파다 1장을 못 넘어가고 있음.
실질적으로 내 삶에 매일매일 이 구절들을 적용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내가 이 1장을 다 소화해내질 못하고 있기 때문임.
법구경이 진짜 굉장한 경전이다.
후대의 고차원적이고 체계적인 불교 철학에 비교하면, 거의 고조선 시대의 8조법 수준으로 성기게 쓰여진 몇몇 구절들 모음일 뿐인데,
심지어 후대의 불교 문구들은 아주 막 예술 경지에 올라서, 구절 자체가 심미적인 통찰을 주기도 하는데,
법구경이라는 이 고대의 간략한 도막글들은… 그런 예술성 아무것도 없이도, 아주 간결한 규칙들로서, 도리어 모든 방향에서 내 생활 반경을 압박해 오고, 나를 불교 수행의 규율 속으로 가둬 버린다.
물론 이제, 그 짧은 도막글을 해석하는, 내가 배운 선불교 문화의 배경지식이, 같이 그 도막글 뒤에 플러그인처럼 같이 가동되고 뒷받침되고 있어서이기도 할텐데, 정말 짧은 글로서, 전반을 아우르고 건드려 버리니까,
오히려 복잡하고 예술적으로 심미적으로 배웠던 것을, 간결한 글로 요약당해서, 마치 팩트체크 당한 머시기마냥, 꼼짝을 못하고 한 눈에 자기 포지션을 포착을 당해버린다.
물론 굉장히 연성의 철학적 규율이긴 한데, 그것이 굉장히 강렬하게 작동하게 됨. 왜냐면 후대의 다양하고 잡다한 문헌들이 함께 지지대를 세워 버리니까.
“(물질/육체적)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고 추구하며 사는 자, 감각문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자, 먹는 것에 자기 분량(절제)을 모르는 자, 약한 정진력만을 내며 만족하는 자, “
“이러한 자는 마라(마왕)가 무너뜨린다. 마치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물질/육체적)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고 추구하며 사는 자”
=> 인서타에서 왕가슴 미녀들 엄청 구경했죠?
“감각문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자”
=> 제어하긴 커녕, 뭐가 더 재밌을까? 뭐가 더 즐거울까? 계속 탐구하고 고민했죠? 페북에 아이돌들 이쁜 사진 누가 공유해서 올라오면, 주저 말고 최고에요 눌러댔죠?
“먹는 것에 자기 분량(절제)을 모르는 자”
=> 배부르게 먹고 혈당스파이크 또 왔죠?
“약한 정진력만을 내며 만족하는 자”
=> 적당히 수행해서 현상 유지만 하며, 용맹정진하질 않죠??
적당히 수행 – 이게 판타지라고 치면, 마나가 소진되었을 때, 자기 마나통의 마나를 채우는 건 금방 되거든. 말하자면 현상 유지지. 근데 그 마나통 한계 자체를 늘리려면 거기부터가 진짜 수행이고 빡세지는 거거든. 그걸 하길 잘 안 하려 듦. 지금 유지만 해도 살만 하니까;; 고통이 이미 줄어든 상태니까;; 불도를 완전히 성취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약해지는 거임;; (복이 많아 살기 편한 천상의 존재들은 그래서 불도 성취가 어렵다고 함. 근데 그러다 죽으면 또 6도 윤회를 하는 거고.)
‘감각문 제어’ 부분만 해도,
이게 선불교 수행의 핵심이거든.
소위 ‘회광반조’라 하잖음? 밖으로 비추는 모든 감각을, 되돌려 내 안으로 머금어야 하는 거임. 회광반조 그게 ‘감각문 제어’를 광명에 빛대어 표현한 말임. 심지어 해보기도 해봤단 말이지, 근데 내가 들어갔던 최상층에 머무르지 않고, 한참 후퇴한 상태임. 이거 열심히 해서 맑아져 있으면, 앞에 있는 사람 마음 같은 건 그냥 한 눈에 읽힘. 그건 기본임. 내가 흰 도화지가 되면, 앞의 물감이 그냥 흡수되어 내 바탕 위에 그려지는 거임.
이 부분을 상세 해설하며 수행법론을 체계화하면 그게 ‘몽산법어'(몽산 덕이 선사)나 ‘돈오입도요문론'(대주 혜혜 선사)이 되는 거거든. 늙은 쥐가 가마니를 쏠듯. 늙은 쥐는 경험을 알기 때문에 그 가마니를 쏠면 그 안에 반드시 쌀이 쏟아져 나온다는 걸 알거든. 반드시 된다는 걸 알고 강렬하게 쥐가, 아주 사람 성가시게, 가마니를 구멍 내고 쏠듯이, 그렇게 화두를 들고서 화두 일념에 들어야 한다는 말임. 또, 암탉이 달걀을 품듯,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법칙인 것처럼. 생명의 법칙인 것처럼. 그렇게 화두 일념을 들고 안에 품어, 감각문을 다스리고 회광반조를 하라는 거임.
“늙은 쥐가 가마니를 쏠듯, 암탉이 달걀을 품듯” 이 두 구절에 그 내용들을 다 담아버리는 아트함이 있는 게, 후대의 선서(禪書)거든.
근까 이런 세부 내용 읽어 놓은 것들이 뒷받침이 되니까
‘감각문 제어’… ‘않으면’… ‘마라가 마치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이런 더듬더듬 고대의 구절에도 엄청난 심미적 깨달음이 밀려오게 되는 거임…
여기까지 오면, 많은 말이 써있어야 꼭 경전이 아니고, ‘감각문 제어’ 다섯 글자만 써져 있어서, 그것만 되풀이 해서 읽어도 이미 경전임;;
암튼 그래서 이 글은 암튼 핑계와 합리화의 글이긴 한데, 그래도 일정한 이치는 담겨 있으니까 쓰는 거임.
그리고 음식 절제/조절도 그래.
당연하게도 ‘혈당 스파이크’가 오면 머리가 둔해지고 일상적인 선정과 삼매 유지가 안 되겠죠? 그만큼 수행이 후퇴하게 된다.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는 이상에는 모든 수행은 멈추고 더뎌지면 후퇴하는 거임.
머리 맑게 하고, 속 비워두는 게, 기본적으로 수행에 유익함이 있다는 거임.
암튼 그래.
법구경 담마파다 1장을 못 벗어나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