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의 내외공관 : 법공은 믿음으로 이루며, 아공은 수행으로 이룬다

<초기 불교의 내외공관 : 법공은 믿음으로 이루며, 아공은 수행으로 이룬다>

대승불교 화자들은 초기 소승 불교에 대해 ‘아공만을 알지 법공을 모른다’는 식으로 흔히 말하곤 한다.

그런데 막상 초기 불교에 대해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특히 ‘아공’ 즉 ‘아무아’라는 것의 ‘맥락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면 ‘아공’ 즉 ‘아무아’라는 말의 의미란 곧, ‘나라는 것에도 내가 없다’ 즉, ‘나라는 것도 저 법계의 현상과 마찬가지’라는 의미기 때문이다.

‘나’와 ‘세상’을 나눠 두고, ‘나’에 ‘내’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곧 그 ‘나’도 곧 ‘세상’ 쪽에 속하는 대상임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남으로 나누던, 안과 밖으로 나누던, 모두 마찬가지다.

나와 남 양분법에서 나를 빼면 남만 남는 것이고, 안과 밖에서 안을 빼면 밖만 남는 것이다. 나에 내가 없다면, 그것은 밖이고, 세상이고, 타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밖과 세상은 이미 당연히 인연생 인연멸하며, 형성된 것은 소멸한다는 말처럼, 무상하여 법계의 인연상을 따른다.

세상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납득하는 것은 쉬운데, 세상이 왔다갔다 하더라도 그 모든 일이 펼쳐지는 동안 ‘나’는 계속 그대로 있는 듯하니, 그 ‘나’도 ‘세상’과 같은 것이다 선언을 하는 것이 곧 ‘아무아’인 것이다.

쉽게 말해, ‘저 밖의 것이 내가 아님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이 안의 것도 <내가 아니다>. 저 밖에도 내가 없으며, 이 안에도 <내가 없다>.’ 이런 의미들이 담겨 있는 것이다. // -> 이 부분의 수행론은 앞에 적은 글을 참조.

또한 덧붙여 말하자면, ‘나라는 것에도 내가 없는데, 하물며 내가 아닌 세상 현상에 있어서랴?’ 하고 ‘하물며 논증’의 구조가 들어 있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아무아가 성취되는 순간에는, 법무아는 당연 동시 함께 성취되는 것이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함경을 보면 먼저 색신 즉 외형적 육신을 관찰하며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나아가 내면의 마음과 정신작용인 수상행식을 관찰하며 무상하다고 관찰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내외의 구성물을 관찰하는 이유는, 이미 ‘그 밖의 세상’은 ‘출가’라는 행위를 통해 떠나 왔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 오온관찰을 설하는 경들 대부분이 ‘비구들이여’ 하고 시작을 한다. 즉 그 듣는 대상이 이미 출가한 상태기 때문에, 세상 인연은 말 할 필요가 없고, 하나 남은 몸뚱이, 저 자신으로부터 수행 방편을 삼게 했던 것이다.

즉 출가하며 떠나보낸 것들은, 이미 ‘나 아닌 것’임이 출가로서 ‘실천’된 상태이니, 더 말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생각 뿐만 아니라 행위까지 완성되었는데, 무얼 더 따져야 하겠는가?

따라서 출가 전통의 초기 불교에서는, 애초의 그 수행법들이, 세속의 대중들의 수행 방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법공을 말할 맥락적 필요성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세속의 인연을, 실천하여 떠났으니까.

때문에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애초에 그것에 연결되는 술어가 ‘바른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삶으로 출가하였으므로(正信家非家出家)’ 하고 바른 믿음이란 곧 집에서 집 없는 삶으로 출가하는 마음가짐을 자주 의미하곤 한다.

즉, 그 ‘바른 믿음’이란, 이미 출가를 통해 ‘법공’을 성취하여, ‘아공’에 대한 의문만 남겨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미 믿음으로 법공을 이루었고, 남은 것은 아공뿐이니, 아공만 성취하면 그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처는 그 비구에게 오온, 즉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물에 대해, ‘이것들이 다 무상하다’ (무상 = 고 = 공 = 비아, 어느 것을 넣어도 다 같은 뜻이다.)고 가르쳐, 그것을 관찰하여 무상관을 완성하면, 해탈하여 부처가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미 법공을 이루고, 아공까지 이룬다면, 그것으로 내외공을 이뤄 완전한 깨달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화자들은, 소승불교라 하여 우습게 여길 것이 아닌 것이다. 대승의 수레가 비록 크다 하나, 소승의 결단은 이미 ‘출가’로서 수행의 시작을 하는 강렬한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오롯한 믿음으로 세속을 등진 출가자에게, 이미 ‘법공’은 말 할 필요가 없다. 웃길려는 유머가 될 뿐이다.

또한 행여 부족하다 하더라도, 출가자가 관법으로 아공을 이루는 순간, ‘하물며 논법’을 통해 법공도 즉시 성취한다. 내가 없는데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립되는 말이 아니다. 주체가 탈락하는 순간 객체도 동시에 소멸한다. 이것은 대승불법이 늘상 공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오로지 관법이 미약한 자들만이, 이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고 의혹을 갖고 의심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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