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을 버리고 즉시 안심

불교는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외침이나, 우리 가진 관념을 하나하나 역추론하며 근본적 평형점 되돌아가는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따라, 인간의 성격과 개성 자체를 특질적으로 새롭게 재창조하는 일이다.

마치 아담이 태초에 그러했듯이, 자기 자율적으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맨몸으로부터 나머지는 모두 감사한 일이며, 부족한 것은 없다.

삶을 다 살아내고서야 도달한다는 그런 안식을 더이상 기다릴 필요 없이, 즉시에 안심을 이루고, 지복으로부터 모든 나머지 삶을 끌어낸다.

이렇게 해야 모든 사람이 제각기 행복하고, 각자가 다 플러스가 되지, 쟤는 가진거 많으니 그걸 빼앗아야 나는 행복하겠다, 쟤는 악이고 나는 선이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 마음은 영원히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불행’을 가르치며 피해의식을 학습시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걸 심지어 ‘의식화’라고 부른다. 전부 양놈들의 문화에서 넘어온 것이다.

양놈들의 문화에는 대체로 기독교가 탄압받던 시절 품은, ‘이방 교도들은 다 악이요, 우리만이 선택받아 순결하고 선하다’라는 은연중의 사상이 들어 있다.

서양 사상의 좌파적 경향은 대체로 그러하다. 자신의 이익을 원할 때에, 반드시 무언가를 악으로 지정해야만 한다. 그런 사고를 수천년간 쌓아 올려왔기때문이다. 나팔 소리로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고, 삼손이 나귀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들 수천을 쳐죽이듯, 자신들이 악이라 지정한 무언가를 무너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됨’인데, 그것을 ‘선한 일’로 포장하여 선/악 대결 상의 ‘정의로운 승리’로 프레임 전환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잘 살던 여리고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다 무슨 죄란 말인가? 히브리 족속이 피해망상과 자기 욕심에 쳐들어가 전쟁을 벌이니, 순 다 그 피해망상과 욕심이 세상에 해로운 일이 될 뿐이다.

그 피해망상과 그 욕심을 전부 ‘선한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서구 유래 좌파 사상들의 특질이다. 상스러운 소리를 더 열심히 열성적으로 할 수록 스스로가 ‘선하다’는 망상에 빠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냥 상스러운 사람일 뿐이다. 충분히 상스럽고 탐욕적이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맘대로 악으로 묘사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러고선 ‘옳은 일’이라 믿는.

이런 상스러운 탐욕과 폭력을 즉각 포멧하는 것이 ‘자연상태’이며, ‘데카르트적 성찰’이다.

세상에 무언가가 반드시 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내 생각이 그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특별한 근거가 있지도 않다. 그냥 어느날 그것이 내 기분에 내켰을 뿐이다.

주술적인 시나리오를 쌓아 무언가가 무너져야 자신이 행복해진다는 망상을 해봐야, 전부 미신이고 사실이 아니다. 행복은 원래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있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 찾으면 영원히 찾을 수 없다. 특히나 싸움과 욕설을 통해서는, 영원히 행복과는 이별이다. 그것은 세상이 성립된 이래로의 영원한 진리이다.

이러한 근본 평형으로 되돌아가, 다시 새롭게 세상을 마주 대하는 것을 ‘순수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순수 의식과 순수 현상만 남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매우 불교적이기까지 하다. 소위 우리의 심불(마음의 부처), 즉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능히 이 세상의 모든 공덕들을 낸다’는 것이다. ‘보라 이 문명과 풍요가 어디서 다 나왔는가?’ 그런데도 그걸 보고 ‘불행’과 ‘부족’만을 떠올리니, 이것이 뒤틀린 견해, 즉 전도몽상인 것이다. 욕 할 대상이 필요한가? 그 성질적 경향성이 그대를 불행으로 영원히 몰고가고 있을 뿐이다. 그 경향성을 따라잡아 소거하면, 이제껏 언제나 ‘영원한 행복’이 곁에 있어왔다는 것을 안다.

이런 내용들을 잘 담은 노래 가사가 있다. 김국환의 ‘타타타’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맨 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정말로 사실적인 견해로 보자면, 옷 한 벌도 이미 맨 몸으로부터 하나의 플러스인데, 이것에서부터 벌써 ‘부족’이라는 피해망상을 내면화하고, 심지어 온 세상을 타박하기 시작한다면, 그 견해는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즉시에 파괴되어야 한다. 그것이 다 수천년 간 통용되어 온 본래적 의미로서의 ‘망견’(妄見)이다. 쉽게 말해 현대인의 정신병으로서, 문화의 땟국물에 의해 교육되고 내면화된 ‘환각’에 시달리는 일인 것이다.

‘부족하다’는 환상에 시달릴 때, 그 이면에 숨은 자기 욕심을 보고, 즉시에 그 마음을 쉬면, 즉시에 그 한 생각 안에서 부처를 이루고, 그 한 번의 경험을 잘 탐구하면, 다시는 세상 조건에 미혹함이 없다. 언제나 영원한 ‘자기 지복’이 계속되는 것이다. 행복은 거기에 있고, 망상을 따라 온 세상을 전전하는 데에는 없다. 거기에는 계속된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한 온갖 성인병만 남을 뿐, 전혀 행복이 있지 않다.

2025년 11월 3일 월요일 오후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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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교를 통해, 불교가 제공하는 ‘사실적인 관찰’을 통해, 새 시대의 인격 자체를 새롭게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4차 산업시대니, 마켓 3.0이니 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의 인격 자체를 예를 들어 ‘아라한1.0’으로, 새로운 지평의 포맷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피해 망상만 없어도 삶은 굉장히 가벼워지는 것이다. 고작 나같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를 겪고나서 고군분투 살아가면서도, 행복을 느끼는 데에는 이 세상이 부족함이 없다. 불평하자면 모든 것이 문제지만, 행복하자면 지금 당장으로부터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그 방법들이 불교에는 늘 있어왔다.

자유는 스스로가 행복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는 것이지, 누구를 벌주고 저 돈을 정치분쟁화 해서 권력의 힘으로 손쉽게 이리 가져오고, 그렇게 ‘반드시 이뤄야 할 외부 조건상의 변화’를 목전에 매달아 두고는 오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이미 노예이기 때문이다.

2025년 11월 3일 월요일 오후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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