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1

아직 서두의 삼 십 쪽밖에 읽지 못했지만, 하이데거는 나를 하이데거로부터 튕겨져 나가 더욱 선불교도적 본질을 획득하게 만든다.

선수행자 입장에서 하이데거를 대할 때, 그는 지나치게 고정된 선입관과, 자기 세계관적 경향성을 지닌 인물이다.

선불교에서는 개별자가 소멸할 때 전체 역시 소멸한다. 반대로, 개별자가 감각기관을 통해 전체를 반연할 때,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개별자도 생겨나고 전체의 의미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함’이 모든 개념 분화와 생사고락을, 즉 고통스런 반복인 ‘윤회’를 만들어낸다.

반면 하이데거는 ‘전체 안에서’ ‘전체 속으로’를 너무 많이 의식하고 언급한다. 인간이 ‘어디서든 고향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게 형이상학(철학)이다’라는 노발리스의 싯구를 언급하며, ‘전체 안에서 의미를 묻는다’고 지속적으로 ‘전체라이팅’을 하는데, 전혀 와닿지도 납득되지도 않는다.

왜냐면 전체를 굳이 환기하지 않더라도, 그냥 그 순간 짧은 생각으로 얼마든지 고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이데거의 지속적 설득(주입)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같다고 해봐야, 결과적으로 같다는 말이 이미 동시에 ‘과정에서 상이함’을 내포한다. 그럼 그 둘은 다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반드시 전체를 환기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개인적 의미로 한정해버리고 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이 서술들의 필연적 한계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삼 십 여 쪽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전체로서의 어떤 것에 부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전체 안에서’가 곧 세계이다” 이 문장이 등장한 이후로,

즉, 선불교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이 하이데거의 견처임이 드러난 이후로, 그의 견처에 근본적으로 흠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전체 안에서 부름을 받는다’는 유혹을 강렬하게 환시처럼 환기하며, 그 유혹에 사로잡혀 그 유혹을 마치 ‘원래부터 자기 자신에게 있던 열망’으로 삼았으면서,

심지어 그 두 단계를 자신이 분별 없이 지나쳤나는 자각이 없는 채로, 거기에 더해 심지어는 ‘그것이 인간의 근본 기분’이라며, 타인에게 자기 자신의, 유혹에 넘어감과 선택의 책임을(즉, 또 하나의 ‘세계관’을), 타인에게 모두 뒤집어 씌우고 있다.

이 과정들은 선수행을 조금이라도 한 눈 밝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남 웃길 소리일 것이다.

크라운제이의 세속적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네 다린 자꾸 내 눈을 봐”

자기 자신이 다리를 보는 것인데도, 그 다리의 유혹이 너무나 생생해서, 자기가 자기 눈으로 그 다리를 보고 있는 것도 망각하고, 도리어 그 다리가 자기 눈을 보고 있다고,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가사로서는 훌륭한 가사이다.

“인간은 ‘전체 안에서’ 라는 부름을 받는다”

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크라운제이 가사 속 화자가 다리에게 느끼는 수준의 유혹을, 하이데거가 전체로부터 당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 보게 된다. 내게 그 소리는, 그저 하이데거 본인이 그 유혹을 당해 그 열망메 빠진 것일 뿐이다. 불교적으로는 ‘중생이 미혹(알아차림이 엄밀하지 못)하여 ‘제 마음’을 ‘물건’이라 하네’ 하는 케이스인 것이다.

하이데거가 내게 가하는 ‘전체라이팅’이 숫제 그런 식이다(이런 초등적인 술수로.. 누굴 속일라고? 라는 선수행자적 모먼트가 계속 발동한다.). 즉,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전체 안에서’라는 환시에, 그리고 그같은 강렬한 유혹으로 인해, 그 유혹을 마치 자신의 본래 열망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주 강렬한 열망에 빠져 있으면서도(선불교에선 이러한 것을 ‘그 견해에 흠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도리에 인간이 그러하다며, 인간 규정에 덮어 씌워, 멀쩡히 있던 나에게까지 ‘자신의 그 유혹당함’의 패착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설사 부처가 살아 와도 이런 소리는 긍정 못 하지.)

물론 내가 불교 아함부와 유식학의 세계관에 근거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유독 도드라지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아함부 철학에서 세계는 그저 12처일 뿐이기 때문이다. 6근 6경의 12처가 전 세계일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전체’라는 것은 그저 ‘전체라는 네 생각’이지, 전체라고 떠올릴 때조차 우주의 모든 전체를 낱낱이 다 네 머리에 떠올리고 담을 수는 없다. 그러한 ‘전체’는 이미 사실이 아니다. 사실도 아닌데 그것으로부터 기인하여 철학과 과학이 된다면(가능하다고 하면), 남 웃길 일일 것이다.

그 외에, 개별화와 고독화를 통해 ‘홀로 전체를 대면하게 된다’는 식의 서술은, 마치 중세 헤시카스트들의 말을 출처 표기 없이 인용하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만든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로서의 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4C 카파도키아의 그리스도교 교부들

“그것은 영혼의 기쁨이자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
-성 요안네스(St. John of Damascus)

또, 그가 말하는 ‘사로잡힘’이란 곧 삼매에 드는 것이고, 그가 말하는 ‘개념파악’이란 곧 지혜의 분별작용이며, 철학함이 하나의 ‘기분’이라 말하는 맥락에서는 그 기분이란 곧 ‘선정’을 의미한다는 마음의 목소리가 일어나고, 그리고 그가 이것들을 묶어 표현하는 ‘철학함의 근본기분들’이라는 표현에서는 불교 선종의 ‘정혜쌍수’의 뉘앙스를 다분히 느끼게 된다.

사로잡힘이 선정·삼매이며, 개념파악이 지혜의 분별작용, 그러니 이 둘을 묶은 근본기분은 정혜쌍수라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종교 문헌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이러한 서술들이 신선하거나 창조적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출처 표기 없이 이용하고 있는’ 기분으로 느껴진다.

…그리하여 하이데거와의 첫 만남은 나를 오히려 하이데거로부터 완전히 튕겨져 나와, 더욱 선불교도가 되도록 이끌어 낸다.

아무튼간에 내가 관심 갖고 천착하기 좋아하는 주제가 펼쳐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모든 뇌세포가 반응하며, 온갖 영감하에, 다양한 글을 적어두게 만든다.

해서 이것은 확실히 좋은 책이다. 다 읽고 났을 때 굉장한 성장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오히려 최근에 읽은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고익진)가 깔끔한 동시에 너무 짧고 단순하다는 인상을 받아 아쉬웠는데, (생각보다, 기대했던 것에 비해, 나를, 많은 레벨업을 못 시켜줬다),

이 책이 그것을 대신해 많은 레벨업을 시켜줄 것 같다.

물론, 여기 적은 것 처럼, 내가 독서를 할 때, 그저 곱게 ‘네네’하며 읽는 타입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하며, 전투적으로 싸우며 읽어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 물론 내가 한 시대의 거장을 쓰러뜨릴 수는 없겠지만 – 적어도 나 자신이 레벨업하는 경험치는, 그 싸움 속에서 벌어갈 수가 있다. 그걸 시켜준다면 그 책은 매우 좋은 책이다. 이 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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