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성흔 위에 다시 사랑하길 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위대한 것이지, 아무 상처 없는 무균실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의 실존적 정의가 될 수는 없다. 생명은 계속 던져지는 주사위이고, 인생은 등락을 반복하며 위대해지며, 인간은 그 자체가 독립변수로서 환경 속에서 끝없이 적응해내기에 존엄하다.
‘인간이라는 예술’을 무기력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남을 ‘자신이 무엇을 해줘야 할 존재’로 파악하며, 남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알량함들은 모두 거부한다. ‘사회’라는 것으로 에워싸 인간이라는 것을 한탄과 절망 속에 가두려는 시도는 악랄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들에 나가서도 살 수 있으며 산에 들어가서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나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감히 사회가 어찌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존엄한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누가 잘났다고 감히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알량한 보호를 받았다고 고작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 행복하게 여기면 행복한 것이요 스스로 불행하게 여기면 불행할 뿐이다. 오직 남을 우습게 알고 인간의 존엄을 믿지 않는 알량한 인간들만이 ‘너는 불행하다’ 선언하며 ‘나의 도움을 받으라’ 공언한다. 남을 고작 자신이 무언가 해줘야 할 존재로 몰아세우고, 그런 모자란 남에게 자신이 대단한 걸 해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역겹지 않은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피해망상적이며 근본적으로 가스라이팅일 뿐이다. 감히 인간을 향해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과는 단 1초도 같은 공기를 숨쉬고 싶지가 않다.
인간의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 않고서는, 마치 행복이 남들의 행동을 통해, 혹은 국가가 무언가를 해줘서 일어날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서는, 그런 사람은 영원히 남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든 세상의 일을 한탄하며, 물질에 종속되고 타인에 종속되어, ‘스스로의 행복’에 영영토록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인간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최악의 개성인 셈이다. 그런 것으로는 전혀 아무런 독존적인 존엄함도, 불굴의 위대함도, 혹은 모든 생명이 당연하게 행하는 최소한의 세계 적응도, 해내지 못하는 끔찍한 말종을 세상에 탄생시킬 뿐이다.
2025년 11월 15일 토요일 오전 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