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인간이라는 게, 생명체기 때문에, 생존 작용에서 오는 우연성에 대단히 지배를 받는다.
생존이라는 건, 결국에는 ‘적자생존’이잖아?
그리고 적자생존이라는 건, ‘주어진 환경’에 대한 ‘최적화된 반응’인 거고. 그 반응, 그 대응, 그것이 일어나면, 그 존재는 생존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 존재는 없어지는 거고.
그리고 생존이라는 것에, 우열은 없고, 그냥 ‘존재한다’ 정도만 있는 거잖아? 토끼도 토끼로서 우수하게 적응된 상태인 거고, 진드기도 진드기로서 우수하게 적응된 상태인 거고. 토끼나 진드기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어야 하고, 이런 문제가 전혀 아니란 말이지. 이미 적응을 해낸 우수한 생명체인 거야 각각이 모두가 다.
결국 그렇게 치면은, 모든 존재는 ‘최적 쓸모’의 자리로, 어떻게든 굴러 들어가게 되어 있단 말이지. 옛날에 그런 얘기를 들었어. 그림쟁이 사주는 스님이 돼도 그림을 그리고, 금전에 밝으면 스님이 돼서도 절 운영을 한다고.
결국에는 재능이라는 거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한 방향의 돌파구로 돌파해 나가는, 그런 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데에 자원이 가장 적게 들어가서, 그 방향으로 한 생명체가 흘러들어가 ‘환경적 적응’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나는 봐.
그러니까, 모든 생명체는,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도, 담장을 넘는 이미지가 아니라, 담장이 가장 낮은 방향으로 계속 뛰고 있는 거라는 말임. 비용이 많이 들어가면, 그 일은 그 생명체에게 유지/보수 측면에서 부담이 되는 일이지. 그러면 뇌출혈이라도 와서 쓰러지고 거기서 멀어진다고. 아무리 어거지로 붙어 있으려고 해도 못 붙어 있어. 결국에는 ‘타고나는’ 싸움의 영역으로 가버린다고.
잘 나가는 놈들은 건강까지 타고 나. 근데 건강을 타고났다기 보다는, 그 일에 스트레스가 없게 태어난 거지. 결국 재능이란 소모값이 적은 영역인 것에 가깝고, 출력이 절대 기준이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출력이 낮아도 자기 최고 최적 재능의 환경을 찾아, 흘러 들어가게 되니까. 소모값이 작다고 하면 더 보편적으로 쓰일 수 있는 중립적 언어가 되지.
결국에는 생물이라는 게, ‘자원 활용 최적화’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프로세스를 따라, 설령 부하가 높은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계속해서 부하가 적은 방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고. 왜냐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 내게 부하가 높게 여겨지는 영역에는, 그 영역의 부하를 낮게 느끼는 개체가 흘러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함. (설령 회사에서 관리자 직급, 부장이 된다 하더라도, 잘 해보자 할 수 있어 << 이런 독려형 부장도 있고, 독설하며 다그치는 부장도 있고, 다양할 거란 말이지. 그게 그런 ‘흘러들어감’과 최적화를 거친 결론이라는 말임. 쉽게 말하면.)
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냐면,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왜 정리하게 되냐면,
독서라는 것이, 두루 읽으려 하더라도, ‘읽혀지는 책’ ‘눈에 들어오고 이해되는 책’ 이것이 결국에는 소화되고, 그 방향으로 계속 가지를 뻗어 나가게 된단 말임. 내가 불교 서적을 200권 가량 읽었는데, 그건 처음 읽었던 청화스님의 법어집이, 구어체로써 아주 고구정녕하고 쉽게 읽혔기 때문임. 물론 어렵게 느껴질만한 한문 어투가 많이 나오지만, 불설(佛說), 이렇게 나오면 청화스님이 “부처불짜 말씀설짜” 이렇게까지 일일이 읊어가며 설명을 하신단 말이지. 애초에 그 법어집 자체가, 신도들이 녹음 테이프를 타이핑해서 간행한 거라, 말 그대로 구어체임.
긍까 거기서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접하고 나니까, 불교 서적들이 이해가 되니까, 그 방향의 부하가 낮아서, 그 방향으로 계속 흘러들어가게 되는 거지.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아주 친절한 마음씨를 갖고, 아주 쉬운 문장으로(그렇다고 수준이 낮아져선 안되고), 완전히 씹고 씹어, 소화시켜서 전달해야, 그 분야가 융성해진다는 말임.
이걸 겪었기 때문에 ‘독일어가 어렵다는 둥’ 하는 모 철학서들의 핑계가 전혀 와닿지가 않았던 거임. 상업 목사 마냥 그 철학 팔아 먹고 살았을 뿐, 진심이 없었다고 느낀 거지 나는. 왜? 청화스님은 안 그랬으니까. “부처불짜 말씀설짜” 여기까지 친절해지려고 한 번 언뜻 생각이라도 해 봤겠냐고. 발번역 해 놓은 사람들이 일평생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 청화스님과 비교해서, 한 눈에 들여다 보이는 거지.
“고독은 우리의 고향이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걸지 않고, 어찌 고향에 가겠다고 하는가. 처절함이 없이 어찌 고향에 이르겠는가. 치열함이 없이 어찌 고향에 이르겠는가.” 이렇게 말씀하신단 말이지. 물론 니체를 인용하신 것 같기는 함.
“고독지옥(孤獨地獄)이라. 우리가 외로운 것도 지옥같이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니이체 말대로 ‘고독은 그대 고향이다. 고독한 가운데 그대의 고향을 가라’이런 말은 우리한테 감동을 줍니다. 고독을 못참으면 삼매에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독을 못 참으면 무슨 필요로 승려가 되겠습니까?” 이런 말씀도 하셨기 때문임.
“도반이 좋기는 좋으나 너무나 밀착하면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관심을 두어야 되겠지요. 대중이 좋으나 공부가 익은 다음에는 또 방해가 됩니다.”
“달마의 9년 면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석존의 6년 고행상을 상기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짐짓코 우리가 선택해서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니까 습기(업의 관성) 때문에 고독한 때는 친한 사람도 만나고 싶겠지요. 그러나 냉철하게 자기를 추슬러야 합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말씀을 하신다고.
아무튼 요사이는 ‘생물’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 기반은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리사 펠드먼 배럿)’이라는 책이 기반임. 알로스타시스(자원 관리 효율화, 신체 예산) 개념을 여기서 배웠거든. 배워두니까, 그 방향으로 부하가 떨어져서, 계속 그쪽 개념을 써먹는 생각이 일어나는 거지. 모르는 것은 떠올리기가 어렵고 부하가 높은 작용이니까.
그러니 ‘친절하고 쉽게’가 자기 분야의 활성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거겠냐고. 그러니 내가 열받지. 망한다 타령하기엔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 여겨지니까. 그리고 그건 자긍심 부족이라 생각되니까. 애착이 있었으면 반드시 더 쉽고 친절하게 했을테니까. 한 글자라도 알려주고 싶었을테니까. 애니메이션 오타쿠들도 자기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알려줄 때에 열과 성을 다하는데, 학문 잘 배운 사람들이 오타쿠 수준의 진정성도 없다고 느껴지면 화가 나지. 돈 안 받고도 그래 하는데, 돈 받고 이래 하면 안 된다고 느껴지니까.
아무튼간에 요즘에는 ‘흘러들어감’ ‘부하의 절감’ 이런 방향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양자 터널링 같은 것도 이와 비슷한 거겠지. 터널링 확률도 결국 장벽의 크기가 계산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보면 이런 원리는 뭔가 범우주적 원리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근데 쓰고 나서 첫 문장을 다시 보니까, 원래 쓰려던 내용이 이게 아니었네?;;
부하가 낮은 것 + 우연히 발생된 것, 이런 것들
우연히 발생된 경험을 통해, 그 부분에 숙련이 발생해서, 그게 부하를 낮추는, 이런 게 일어난다고.
마치 생각하기로는 사람이 이성이 있다는 말이, ‘우선 순위’ 위주로, 쫙 줄 세워서, 가장 중요한 일, 가장 먼저 해야만 되는 일을 먼저 처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중요한 일들 중에서, 가장 해볼만한 일, 그리고 부하가 낮아 쉽게 통과될 것 같은 일을 할 뿐이라고.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게 아니라.
마치 온갖 청소 계획을 짜놓고는, 그 중에 햄버거 먹고 쉬는 것부터 한 나의 게으름이 증명한다(?). (증명까지는 안 됨.)
완벽한 청소 계획을 짜놓고는, 햄버거 먹고 쉬고 나서, ‘음… 책이나 볼까?’ 하고 있단 말이지.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해볼만한 일, 그리고 부하가 낮은 일, 그리고 어쩌다가 하게 되어 경험이 있게 된 일, 이런 것들이 그 존재의 적성과 ‘흘러들어감’을 계속 일으킨다. 그러고 나면 마치 모나드가 어느 곳에 놓이듯, 그 존재는 그 자리에 ‘놓이게’ 되는 거야. 거기서 계속 무슨 작용들을 하게 되는 거지.
그게 소위 ‘자리 잡는다’ 는 거겠지. 사람이 취직하고 직장생활 하면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 말야.
그리고 문명사회의 그런 일이, 지극히 그냥 한 생명체의 생명 작용의 원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을 쓰려다가 설명하다 멀리 간 거였어. 맞아. 우연히 겪은 일들.. 빼먹어선 안 되겠지. 그냥 그렇게 합리적이거나 결정된 운명 그런 게 아니라, 인생이라는 게 이성적으로 계획되고 조율되는 무엇이 아니라, 그냥 ‘흘러들어가는’ 거야. 결과론적으로 그 곳에 있게 되는 거지 모두가.
그러면 불교는, 내 맘대로 되지도 않는 그것에 대해, ‘내려 놓음’을 선언하기 되게 좋아진다. 물론 내려 놓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려 놓는 것은 아니지. 일상 생활을 충만하게 행복 속에 영위하면서, 불필요한 바람들을 내려 놓는 거임. 그러면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감사하고 축복이 되는 거지.
아 물론 불교적 맥락은 감사와 축복 보다는, ‘외부 사물은 내게 와서 닿을 수 없다.’ ‘그것은 <거기>에 있고, 이것은 <여기>에 있다.’ 이런 통찰들에 더 가깝긴 한데, 감사와 축복의 맥락으로 말하면, 대중적으로 이해하기가 더 쉽고 빠르니까, 인지 부담을 줄여주려는 내 배려 ^^;
그리고 결국에는, 나는 후설에게 더 관심이 있지만, 그의 순수현상학이, 불교적 삼매, 그리고 생각의 첫 모습, 그리고 자성청정심 이런 것들과 관계되는지 아닌지 더 상세히 확인하고 싶지만,
한국어 후설 책들이 개 똥 쓋들이라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그런데 독일어 원문으로부터 지피티 번역하면서 보려면, 이게 인지 부하가 되게 높은 작업이 되어서,
심지어 이것들을 보는 일은 내가 돈도 안 되고, 나는 불교 컨텐츠를 만들어 적재를 시켜야 돈이 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 부하가 더 낮은 일인 ‘하이데거 철학서'(아주 웰메이드로 잘 번역됨) 읽기를 하게 된다는 점임.
후설의 관심 우위, 불교 컨텐츠 제작의 우선순위 이걸 제끼고, 하이데거가 나의 Queue를 차지한다고. 왜? 쉽게 잘 쓰여 있어서. 생물체로서 마다할 상황이 아니어서. 생명 작용이 나를 그렇게 이끌어서.
결국에는, 이 과정을 설명하려고 이 긴 글을 썼다~ 이말이야. 나 자신을 설명하려는 일기인 셈이지 그냥 뭐. 내가 쓰는 글은 다 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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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내가 철학서를 끝내 포기 하지 못하고 계속 시도하는 것은, 대학교 때 ‘철학입문’ 수업의 경험이 되게 좋았기 때문이야.
그 수업은 ‘철학의 뒤안길'(이기상, 이말숙 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강의하신 교수님(강사님)은 독일 유학을 하면 마르크스를 배우러 갔다가 칸트를 전공하고 오셨거든.
수업은 문답식이었고, 마치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하듯 즉흥적인 콘서트처럼 교수님이 모든 질문에 답변하며 돌아갔다. 그 경험이 대단했어. 그래서 나는 그때에 철학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던 거야. (그때 내가 대학 신입생이라, 어쩌다보니 처음으로 ‘독일 박사는 그냥 박사가 아니라 박박사다’ 하는 말들을 들었고, 그 철학입문 교수님을 보고 그 말이 이해가 갔어.)
암튼, 달리 말하면, 이것 또한 ‘철학에 대한 내 인지적 부하를 낮춰준’ 계기였던 거지. 여기서 그 경험이 나를 들어올려(레비테이트) 계속 행사되는 마법적 위치 에너지를 가지게 만들었던 거야.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여정의 결론으로, 지금 현재 (그때의 교재인 철학의 뒤안길의 공동 번역자 중 하나인) 이기상 교수님의 하이데거 번역서를 이 아침에 읽고 있다. 이게 엄청난 우연의 결과로, 엄청난 필연에 도달한 하나의 사건인 거야. 그리고 그 과정은 모두 생명 작용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지극히 하나의 ‘생명 실현 작용’으로.
++ 심지어 그때 그 책, ‘철학의 뒤안길’이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잘 번역되어 있었던 것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로 여러 철학책을 접하면서, 이 정도로 잘 번역된 책이 드물다는 걸 알게 되고, 이기상 교수님 블로그도 찾아 보고, 페이스북에서도 친구를 맺고 했으니까.
어떤 우연들은 치밀하고 지속 반복되는 필연들을 낳는다. 그 시작된 지점은 순전히 우연이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완전히 필연이야. 왜? 그때의 그 철학 수업과 그때의 그 철학 번역서가 ‘친절’ 했으니까. 친절이 엄청난 걸 낳는다. 청화스님도 매우 친절했고. 왜냐면 친절은 생명체의 부담을 엄청 줄여주니까. 고맙고 ‘생명 존재로서의 배려’를 받는 일이, 되니까. 엄청난 거지 그게. 생명이라는 게 거기에 다 달려 있고, 그게 환경적응도 하게 하고, 적자 생존도 하게 하고, 진화도 하게 만들어서, 지구로부터, 암석으로부터,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니까. 그게 그걸 다 일으키는 것이니까.
미친 거구나. 내 이해가 오늘 아침에 엄청나게 종합적인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 사실 이건 불가역적이기 때문에 진화라 해도 얼추 맞기도 해.
‘흘러들어감’이 내게 되게 큰 주제다. 심지어 맹자가 ‘생명을 아끼고… (등등 하여)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면, 사방 100리로도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포함해서. 서비스란 무엇인가, 상품이란 무엇인가를 포함해서. 그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그 사람을 좋게 해 주는것. 생명체로서의 자원 부담을 줄여주는 것. 그것에 감동도 있고 배려도 있고 그러한. 아버지 장례식 때, 너희 아버지가 자식들 등록금을 내 줘서 자식들 대학을 졸업시켰다, 하는 얘기를 전해들었던 것도 포함해서.
불교 이론에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면, 나는 세상에 좋은 일도 하고 떼부자도 될 것. 그것이다. 내 목표란.
아 이게 사실은 원래부터 선가의 ‘안심법문’의 대요구나.. 마음을 편케 하는 것.
혜가가 눈 속에서 달마를 향해 말했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자 달마가 답하여 말했다. “불안한 네 마음을 가져와 보라.”
혜가가 답했다. “어디에도 그 마음이 없습니다.”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내 네 마음을 편케 하였노라.”
마음을 편케 했다, 이것이 안심법문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가 말하는 다시는 목 마르지 않을 우물물과 같은 것.
세계는 안심법문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돌아가고 있었구나 원래부터도.
그리고 내가 철학서를 끝내 포기 하지 못하고 계속 시도하는 것은, 대학교 때 ‘철학입문’ 수업의 경험이 되게 좋았기 때문이야. 그 수업은 ‘철학의 뒤안길'(이기상, 이말숙 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강의하신 교수님(강사님)은 독일 유학을 하면 마르크스를 배우러 갔다가 칸트를 전공하고 오셨거든. 수업은 문답식이었고, 마치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하듯 즉흥적인 콘서트처럼 교수님이 모든 질문에 답변하며 돌아갔다. 그 경험이 대단했어. 그래서 나는 그때에 철학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던 거야. 달리 말하면, 이것 또한 ‘철학에 대한 내 인지적 부하를 낮춰준’ 계기였던 거지. 여기서 그 경험이 나를 들어올려 계속 행사되는 위치 에너지를 가지게 만들었던 거야.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여정의 결론으로, 지금 현재 이기상 교수님의 하이데거 번역서를 이 아침에 읽고 있다. 이게 엄청난 우연의 결과로, 엄청난 필연에 도달한 하나의 사건인 거야. 그리고 그 과정은 모두 생명 작용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지극히 하나의 ‘생명 실현 작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