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禪佛敎): Zen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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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 승찬 선사 – 신심명(信心銘) (2): 제17구~제32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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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


莫逐有緣 勿住空忍
막축유연 물주공인

바깥의 인연 화합하는 경계를 좇지도 말고, 내면으로 텅 빈 경지에도 머무르지 말라.

막축유연(莫逐有緣) 하고 물주공인(勿住空忍) 하여

一種平懷 泯然自盡
일종평회 민연자진

두 갈래로 뻗어나가지 않은, 하나의 종자 같은 마음을 평평- 하게 품고 있으면, 분별심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마냥, 홀연 자취가 없어지고 스스로 그 여력이 다해 사라진다.

일종평회(一種平懷) 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 하니라.

해설 (클릭)
  • 해설: 이는 마음이 저지르는 두 가지 근본적인 오류를 경계하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는 현상 세계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인 공(空)의 세계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탐욕과 세상을 등진 허무주의 모두 치우친 길이라는 경고입니다. 둘로 나누지 않는 하나의 평등한 마음을 갖추면, 양극단을 오가던 갈등과 분별심은 인위적인 노력 없이 스스로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부터는 레벨2의 갈르침으로 넘어갑니다. 세속적인 욕망(有緣)을 따르지도 말아야 하지만, 반대로 ‘나는 모든 것을 비웠다’는 공(空)의 경지에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수행자는 텅 비워 고요해진 ‘공(空)’의 경지에 머무르고자 하는 강렬한 유혹을 느끼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결국에는 하나의 집착을 이루게 될 뿐입니다. 오로지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써만, 평등한 마음을 이루어 모든 번뇌를 홀연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종래에 늘 ‘한 생각이라도 머무름이 있으면, 부처는 이를 즉시에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초기 불교로부터 이어져 온 ‘뗏목의 비유’와도 일치되는 견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해탈’ 그 자체 이지, 법문이나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말고, 따라서 구속을 벗고, 언제든 해탈하라, 이러한 가르침을 지닌 종교가, ‘교리’에 집착하여, 가두어지고, 한정되게 된다면, 그것은 무아도 원만도, 부처도 깨달음도 없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설법도 또한 하나의 뗏목이라 일축하며, 강을 건넜다면 그 뗏목은 버리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불교를 통해 세속으로부터 해탈하며, 뗏목의 비유를 통해, 불교로부터도 해탈하게 하는 가르침이, 곧 ‘불교’인 것이죠.

    그래서 불교의 해탈을 레벨1의 해탈과 레벨2의 해탈로 나누어, 세속으로부터의 해탈과, 불교 자신으로부터의 해탈, 이렇게 두 번의 해탈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레벨1의 해탈은, 미워하고 사랑함에서 오는 치성한 고통을 넘어서는 것이고, 레벨2의 해탈은 텅 비어 고요한 것에 가만히 머무르려는 유혹을 넘어서는 것이죠. 그러하면 한층 더 두루한 원만함에 계합되어, 더욱 툭 트여 통연명백한 경지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단 한 번의 해탈에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최종적인 원만에 계합합니다. 따라서 레벨 구분이 언제나 통용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유혹이 오는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는 필요한 조언이 되겠죠. 그 외에는 이것도 하나의 뗏목일 뿐이니, 이미 길을 열어 하나의 ‘요결’을 붙들었다면, 이러한 말들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止動歸止 止更彌動
지동귀지 지갱미동

움직임을 멈추어 고요함으로 돌아가려 하면, 그 멈추려 함이 오히려 계속 움직임을 더할 뿐이니,

지동귀지(止動歸止) 하면 지갱미동(止更彌動) 하나니

唯滯兩邊 寧知一種
유체양변 녕지일종

(그렇게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 조차) 그저 양 극단에 머물러 있는 것일 뿐이거늘, 그런 것으로 어찌 두 갈래로 피어나기 이전의, ‘하나의 종자같은 마음’을 알겠는가.

유체양변(唯滯兩邊) 이어늘 녕지일종(寧知一種) 하랴.

해설1 (클릭)
  • 해설: 마조 도일 선사가 선을 배울 때의 이야기다.

    그가 좌선하여 선정 수행을 닦거늘, 회양 선사가 다가와 묻는다.

    “그대는 무얼 하고 있는가?”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을 하여 무엇하는가?”

    “깨달아 부처가 되려 합니다.”

    그 말에 회양 선사는 도저히 못 참고 기왓장을 하나 들고 와 두 팔을 걷어 붙이고 돌판에다 갈아대기 시작한다.

    돌 부딪치고 이가 나가는 소리가 한참 들리니, 마조 도일 선사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묻는다.

    “기왓장은 갈아 무엇하실려 합니까?”

    “거울을 만들려 한다네.”

    “아니,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나옵니까? 괜히 시끄럼기만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아까 (한 술 더 떠) ‘좌선 지어 부처 맹긴다’ 하지 않았나?”

    그러니 마조가 똥 씹은 표정으로 ‘뭐 어쩌란 거야…’ 하고 되물었다.

    “그럼 저더러 어쩌란 말이십니까?”

    이에 회양 선사가 말한다.

    “소 달구지가 가다가 멈추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나 소를 때려야 하겠나?”

    이에 마조가 문득 묘리를 깨달았다.

    이 일화가 맨 앞의 구절들을 풀어 설명하는 일화이다.

    ‘나 좌선합네’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니면 어떤 동작이나 자세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만 한 순간 마음을 돌이키면 될 뿐이니, 다만 ‘짓는 바’로서는 지을 수 없으되, ‘짓지 않는다’ 카는 것도 역시 또 달리 ‘짓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도라는 것은 잡지도 버리지도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니, 다만 담담히 머금어 비추면, 저절로 사라져 오고 갔던 자취도 없이 평평해진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다.
     
해설2 (클릭)
  • 해설: ‘움직임’과 ‘고요함’ 또한 우리가 만들어 낸 분별입니다.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고 애쓰면 오히려 생각은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양 극단에 치우쳐 있으면, 그 둘을 아우르는 하나의 진리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불교 밖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불교를 따르면서도 발생합니다.

    즉, 고요함에만 집착하여 한정되면, 다 끊고자 하는 소승 성문승에 머무르게 되고, 움직임에만 집착하여 한정되면, 감당도 안 되면서 다 포용하고자 대승 운동을 무제한 펼치는, 아주 무리한 억지 보살승 운동을 추구하게 됩니다. 어느 방향이든, 한정되어 머무르는 그러한 ‘머무름’이란, 또 다른 ‘마음의 병통’이 됩니다. 설령 성문과 보살의 모습을, 불교의 가르침을 아주 잘 따르는, 그런 외형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따르지 않더라도, 머무름만 없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후대의 불교는 ‘일승(一乘) 사상‘을 전개합니다. 본래는 3승(三乘) 사상이 발전되어 있었습니다. 불교가 불멸 후 1000년 가량 지나오면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이렇게 3 종류의 깨달음 루트가 있다고 정리를 했던 것이죠. 성문승은 소승불교를 지칭하고, 연각승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와 무관하게 인연 관찬을 하다 홀로 깨달라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하고, 보살승은 말 그대로 불멸 후 500년 뒤에 전개되기 시작한 ‘대승 운동’의 수행자를 지칭하는 것이었죠.

    일승 사상은, 이러한 3가지 분류가 다 의미가 없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성문·연각·보살이 다 ‘일승의 여러 모습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일승, 일불승의 길, 즉 ‘하나의 부처되는 길‘이 있을 뿐이지, 성문승의 길, 연각승의 길, 보살승의 길을 운운하며, 성문이 낫다 연각이 낫다 보살이 낫다 하며 서로 싸우고 취사선택하며 각기 ‘그 안’에 머물러서는, 아무런 부처도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일불승 사상의 독특한 측면입니다. 원융무애자재를 추구한다는 점 말입니다.

    물론 이 또한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대승의 한 갈래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겠지요. 하지만 불교 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소승의 성문승들은 모든 것을 끊고 절연하고, 이것이 가만히 지켜보면, 중생들이 다 같이 불교라는 것을 배우고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학적인 측면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가족과 이별해야만 ‘불교 수행’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친설하신 가르침이 일반적인 세속 중생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겠죠. 어디에만 속하고 어디에는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하기 어렵고,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불교가 진정한 해탈의 종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뗏목의 비유’로써 말씀하셨듯이, 불교 그 자체도 변화하는 것이 필연적인 결론입니다. 물론 전통적 승가의 존재는 세속의 옷을 벗고 시각적으로 강렬한 해탈의 표시를 보이기 때문에,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불교 자신의 논리가 치밀하게 전개되면서, 유마경 같은 재가불자 스승을 도입하기도 하고, 화엄경 같은 경전에서는 거리의 여인(창녀)이 가르침을 설하기도 합니다. 그 모두가 불교가 ‘모든 중생’을 아우르기 위한 노력들이었던 셈입니다.

    한편, 대승의 보살승들은 어떻습니까? 인도에서 대승불교는 늘상 소수파였습니다. 절대 압도적 다수가 소승 성문승들이었죠. 그래서 대승불교는 생존을 위해 자기 교리가 우수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주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시주를 받아 먹고 살고 교단 유지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그런 경향들이 수 대에 걸쳐 누적되면서, ‘대승이 위대하고, 소승은 하찮다’ 이러한 뉘앙스를 다분히 풍기게 되었습니다.

    근데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 가르침을 오래도록 잘 보전해 온 소승 불교가 잘못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승불교의 신자들은 불교에 대한 소승불교의 ‘지대한 공헌’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멀써 말 부터가 ‘소승 불교’라며 얕잡는 말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 혹은 상좌부 불교, 혹은 성문승 불교. 이러한 명칭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부처님의 교설을 잘 보전하여 온 ‘공헌’이 법답게 치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연각승. 연각승은 불교가 우주 보편의 진리를 지향한다는 점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불교에 속하거나 혹은 속하지 않거나, 상관 없이 인연을 관찰하여, 마치 석가모니가 처음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누구나 그렇게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고 불교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연각승을 홀로 깨달았다 하여 ‘독각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과거 7불을 말하며 석가모니 이전에도 7명의 부처님이 계셨다고 말하기도 하고, 아예 지금의 우주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2000명의 부처가 있었다 말하기도 합니다.

    뗏목의 비유연각승의 예시는 모두, 불교가 ‘보편적 진리를 향해’ 그 교설적 내용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불교 교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점, 그것 또한 부처님의 명명백백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때문에 불교 신앙자가 불교가 여러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부인하면, 그는 이미 삼보를 비방하고 불교를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의 불교를 멀리하고,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집착’교리화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런 것들을 부인하고, 오로지 부처님 당신으로 되돌아가, 그 모두가 다 불교의 모습이며, 오로지 하나 있는 것은 그 모두를 통한 ‘일불승의 길’뿐임을 일승 사상은 천명합니다. 우리의 선불교도, 이러한 일승(一乘) 사상, 일불승(一佛乘) 사상의 기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와 관련해 선가에 내려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왕 상시가 임제 선사에게 말합니다.

    “비록 금 가루가 귀한 것이기는 하나, 눈에 들어가면 티끌이 될 뿐입니다.”

    그 말에 임제 선사가 왕 상시를 다시 보며 말합니다.

    “내 그대를 속인으로만 여겼느니라.”

    조주가 왕 상시의 견처를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인으로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왕 상시 같은 상시 관직까지 오른 속세인도, 속인이 아닐 수 있다면, 삼승의 어느 교파도 다 모두 속인이 아닐 수 있는 것이겠죠. 오로지 일불승, 즉 누구든, 지금 여기서, ‘깨닫는다면 부처일 뿐‘입니다. (아주 후대의 불교인 우리는, 선불교는, 이와 같이 말을 합니다.)

    쉽게 말해, 특별히 성자의 모양을 지음 없이, 지금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성내고 울고 웃고 사랑하면서도, 결국에는 그 안에서도 깨달아 나간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외형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아주 속된 속세인이되, 그러면서도 해탈의 도를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미 그러한 것이 불교라 할 정도로, 우리의 불교가 발전이 되어 왔습니다.

    이제 누구나 부처이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속세인으로 살면서도, 번뇌를 여의고, 완전히 해탈한 존재가 되는 것 말입니다. 현대인은 그런 것이 가능할 정도로 아주 똑똑합니다. 불법이 동일하다 하여도, 중생의 교육 수준과 지적 수준이, 고대인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원리를 잘 이해하면 될 뿐, 가족과 생이별하여 생을 다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투철하게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리하여 성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속세인은 성자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속세인은 속세인입니다. 그 구분을 허물면 사람들이 왕왕 혹세무민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재가불자 모임인 해밀문역시도, ‘그 구분‘은 허물지 않습니다. 속세인이 설령 깨달아 부처가 되더라도, 성자 주장을 하지는 않는 것이 옳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속세인이 속세인임을 법답게 주장하기 때문에, 해밀문은 실질적으로 속세 안에서 울고 웃으며, ‘속세인의 해탈을 말할 수 있는‘ 문파가 됩니다.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불통 양처실공

한 종자로 되돌아가 머무는 것에 통달되지 못하면, 거기로부터 갈라져 나온 두 갈래의 입장에서 모두 공덕을 잃어버리게 되니,

일종(一種)불통(不通) 이면 양처(兩處)실공(失功) 하나니

遣有沒有 隨空背空
견유몰유 수공배공

즉, ‘있다’를 보내려 하는 것으로 ‘있음’에 빠지게 되고, ‘비었다’를 따르려 하는 것으로 ‘빈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견유(遣有) 로써 몰유(沒有) 하고 수공(隨空) 으로써 배공(背空) 코 마느니라.

해설1 (클릭)
  • 해설: 이 일화가 이 구절을 잘 설명한다.

    한 때 고승과 그의 제자 스님이 길을 가고 있었다.

    어느 마을을 가게 되었을 때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지난밤 온 비 때문에 물이 불어서인지 개울 물살이 거세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려던 어느 처녀가 불어난 물 때문에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더욱이 처녀는 물을 건너려 하다가 빠졌는지 옷이 젖어서 적나라한 몸이 드러나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고승이 그 처녀를 업고서 개울을 건넜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제자는 ‘스님이 되어서 어떻게 여자를 업을 수 있다는 것인가?’ 하며 고승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이 고승이 혹시 수행 깊은 스님이 아니라 땡초가 아니겠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밤이 되어 허름한 초막에 자게 되었을 때, 제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승에게 따졌다.

    “스님은 수행자가 되어서 어떻게 여자를 업고 개울을 건널 수 가 있습니까”

    고승은 조용히 답을 했다.

    “나는 낮에 개울을 건널 때 여자를 내려 놓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아직까지 그 처녀를 업고 있는가?”

    출처: https://blog.naver.com/sipeng/10110428307
해설2 (클릭)
  • 해설: 하나로 통하는 길을 모르면, ‘있음’에 머물러도 집착이고 ‘없음(空)’에 머물러도 집착이 되어, 어느 쪽에서도 해탈의 공덕을 얻지 못합니다. 세속을 버리려 애쓰다 허무주의에 빠지고, 공을 깨닫겠다며 진짜로 빈 도리를 통달하기 보다는 도리어 ‘공’이라는 말, ‘공’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는 오류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부처께서는 다만 방편이고 뗏목이라 하였으나, 요령이 없는 이들은, 뗏목 위에 집을 짓고 머물러 버립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솜씨가 좋으냐’ ‘솜씨가 나쁘냐’ 했던 것입니다. 말을 들었으면, 그 말은 잊고, 요령껏 달통해내야 하는 것이지, 그 말에 머물러 위라커나 아래라커나, 이 말이 더 좋다 저 말이 더 좋다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도저히 그렇게는, 불법은 영영 안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공에 머물면 안 된다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주 미묘한 맥락에 의거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그 맥락과 다른 맥락이 되면, 공을 머무르는 것이 또 좋은 요령이 되기도 합니다. 말이 아니라 즉시 즉시의 요령을 터득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이 글의 맥락도, 말에 집착해 머무르고, 가만히 가두어져 정체되고 요령 없게 되는 것을 경책하는 것이지, ‘공이라는 말’이 세상에 얼마나 유용한 쓰임이 있었겠습니까? 불법을 드러내는 데에 말입니다. 그러나 도라는 것은 단연코 머무름이 없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없이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머무름이 없다고 할 때에는 두 갈래 길에 머무름이 없는 것이고, 머무른다고 할 때에는 두 갈래 길이 사라진 평평한 한 종자에 머금어져 머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머무름에도 머무름이 없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머무른다고 하고 나면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면 그 또한 머무름인 것입니다. 이같은 요령을 잘 알아서, 잘 터득해서 순간순간 헤매지 않고 잘 적용해 따라가야 합니다. 늘 도에 합치하고, 생멸 윤회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솜씨가 좋은 불종자의 인연이 싹틉니다. 그 솜씨로 양처에서 모두 공덕을 얻어내야 합니다. 부처는 곧 ‘유덕자’라 칭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도를 따라, 순인연하며, 양 갈래의 길에서 모두 공덕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량공덕장’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복덕이 많아 ‘무량수 부처’라고도 합니다. 세속을 떠나는 것이 도리어 세속적 공덕에도 능통해지니, 이것이 보살들이 수백억 화신을 내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인 것입니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다언다려 전불상응

많은 말과 많은 생각은, 구르고 굴러 모두 ‘상응하지 못함’이 되고,

다언다려(多言多慮)전불상응(轉不相應) 하고

絶言絶慮 無處不通
절언절려 무처불통

말을 절제하고 생각을 절제하면, 되돌려져 통달치 못할 곳이 없게 되느니라.

절언절려(絶言絶慮)무처불통(無處不通) 하니라.

해설 (클릭)
  • 해설: 이 구절은 ‘말과 생각’이라는 도구가 가진 분명한 한계와 역설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우리는 ‘많은 말과 많은 생각(多言多慮)’으로 도(道)나 진리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선가(禪家)에서는 바로 이 ‘말과 생각’ 자체가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분별심(分別心)’의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라고 봅니다.

    진리는 본래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인데, 그것을 나누는 도구로 붙잡으려 하니, 노력하면 할수록 엇나가고 ‘구르고 굴러(轉)’ 본질과 ‘상응하지 못하게(不相應)’ 됩니다. 마치 물을 칼로 베려 할수록 물은 그저 흩어질 뿐 결코 잡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분주한 활동을 멈추라고(‘絶言絶慮’) 합니다. 이는 텅 빈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판단하고 재단하는 마음의 시끄러운 소음을 ‘절제’하고 쉬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분별하는 생각의 소음이 그친 자리가 바로 선(禪)에서 말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입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멈춰야 본래의 고요함이 드러나듯, 분별이 멈춘 그 자리에서 비로소 ‘막힘없는 지혜(無處不通)’가 열립니다. 이는 세상을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하나로 통(通)하게 되는 본래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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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on 12월 9,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