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
승찬선사 신심명: 제33구~제36구 #
歸根得旨 隨照失宗
귀근득지 수조실종근본을 따라, 안으로 되돌아가면, 요령을 터득하여 현묘한 깊은 원리(玄旨)를 다 스스로 얻지만, 비추어지는 현상을 따라, 밖으로 따라 나가면, 따라야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 자체도 다 잃어버리게 된다.
▶ 귀근(歸根) 하면 득지(得旨) 하나 수조(隨照) 하면 실종(失宗) 케 된다.
須臾返照 勝却前空
수유반조 승각전공아주 잠시간의 찰나 잠깐이라도, 한 번 더 ‘실제로 돌이켜 비추는 것’이, 눈앞에 비춰진 ‘공(空)이라는 개념적 현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 수유반조(須臾返照) 가 승각전공(勝却前空) 이니라.
– 찰나 잠깐 ‘돌이켜 비춤’이, 눈 앞의 공(空)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그냥) 물리쳐 이겨버리느니라.
해설 (클릭)
- 해설: 바깥 현상을 따라다니는 마음을 거두어, 그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보는 것(返照)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잠깐이라도 이 내면을 향한 비춤이 있다면, 밖의 대상을 공(空)하다고 분석하는 지식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들은 우리 마음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수행의 가장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밖으로 향해, 눈앞에 ‘비추어지는 현상(照)’을 쫓아다닙니다.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즐거운 생각, 괴로운 감정 등을 따라 밖으로 달려 나가다 보면(隨照), 정작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 즉 수행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宗)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는 ‘근본으로 돌아가라(歸根)’고 말합니다. 바깥 현상이 아닌, 그 현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의 ‘근원’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밖으로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돌이킬 때, 우리는 비로소 ‘아, 이거였구나!’하는 요령과 핵심(旨)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실천법이 바로 ‘반조(返照)’, 즉 ‘빛을 돌이켜 비추는 것’입니다. 찰나의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須臾), 밖을 보던 그 눈빛을 돌려 ‘보고 있는 나 자신’을 ‘실제로’ 돌이켜 비추는 그 행위. 이 한 번의 실천이 왜 그토록 뛰어날까요? 그것은 우리가 머리로 배우고 눈앞의 현상으로 분석한 ‘공(空)이라는 개념(前空)’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공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바깥 현상을 쫓는(隨照)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하고 안으로 돌이켜 비추는 ‘반조’는 유일한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의 실제 체험이, 천 마디의 ‘공(空)’에 대한 개념보다 낫다는 강력한 실천의 가르침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37구~제40구 #
前空轉變 皆由妄見
전공전변 개유망견‘세계가 전부 공하다’고 하면서도, 그 ‘눈앞의 공(空)’이 계속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그 전부(공하느니.. 하는)가 모두 ‘망령된 견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 전공(前空) 이 전변(轉變) 하나니 개유(皆由) 가 망견(妄見) 인 까닭이로다.
– 입과 생각으로 ‘공하다는 구호’만 외치고 있을 뿐, 실제로 공함으로 ‘돌이켜 돌아가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구업이고 이것이 의업이이며 이것이 신업이니, 어느 때에 윤회를 면하며, 어느 때에 불도를 닦아 해탈할 수 있으리요?
不用求眞 唯須息見
불용구진 유수식견참됨을 구하려 할 필요가 없나니, 다만 모름지기 ‘참됨을 구하느니’하는 그러한 ‘견해 자체’를 모두 쉬어야 할 뿐이로다.
▶ 불용구진(不用求眞) 할지니 다만 유수식견(唯須息見) 이니라.
– 그럴 거면 차라리 그냥 ‘가만히라도’ 좀 있어라. (너는 알만큼 아는, 다 알만한 놈이, 대체 왜 그러느냐. 그 ‘마지막 고집’이 법집이 되고, 법집은 다시 아집이 되어, 끝내 도를 장애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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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세계가 공하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종종 ‘공(空)’마저도 고정된 실체로 오해하곤 합니다. 눈앞의 공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망령된 견해(‘妄見’)가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밖에서 진리(‘眞’)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으며, 오직 안에서 끊임없이 분별을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를 쉬게 하는 것(‘息見’)이 바로 수행의 핵심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반조(返照)의 실천을 강조한 뒤, 수행자가 빠지기 쉬운 가장 미묘한 함정, 즉 ‘개념으로서의 공(空)’에 집착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많은 이들이 입과 생각으로 ‘세상은 공하다’는 구호를 외치지만(前空), 정작 그들이 체험하는 ‘공’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변덕스럽습니다(轉變). 신심명은 그 이유가, 그들이 말하는 ‘공’이 진정한 체험이 아니라 ‘공이라는 또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도(道)가 아니라, 또 다른 ‘망령된 견해(妄見)’일 뿐입니다. 이는 진정한 ‘귀근(歸根)’이 아니라, 입으로만 업을 짓는 ‘구업(口業)’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시는 곧바로 충격적인 처방을 내립니다.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라(不用求眞).” 왜냐하면 ‘참됨(眞)’을 구하려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참되지 않은 것(妄)’을 전제하는 분별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구해서 얻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견해를 쉬는 것(唯須息見)’입니다. ‘공’이니, ‘참됨’이니 하는 그 모든 ‘견해’ 자체를 그저 멈추라는 것입니다. 주석의 말처럼, “차라리 그냥 가만히 좀 있어라”는 것입니다. 이 ‘무언가를 알아야 한다’는 마지막 고집(法執)이야말로 가장 미세한 ‘나’라는 집착(我執)이며, 도를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41구~제44구 #
二見不住 慎莫追尋
이견불주 신막추심‘이거다’ 커나 ‘저거다’ 커나 하는 두 갈래의 견해에 머물지 말며, 조심히 삼가, 아무런 ‘좇아 추종하거나’와 ‘찾아 탐구하거나’를 하지 말지니,
▶ 이견(二見) 에 불주(不住) 하고 신막추심(慎莫追尋) 할지니
纔有是非 紛然失心
재유시비 분연실심조금이라도 ‘이거다’ 커나 ‘저거다’ 커나 하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가 생기는 순간, 거기에서부터 온 세상이 펼쳐지고, 모두 어지러이 흐트러져, (그 안에서) (그 흐트러짐을 전부 쫓아 다니다가), (별 수 없이 다들 소진되어), 제 마음을(제정신들을) 잃고 마는 것이다.
▶ 재유시비(纔有是非) 커든 분연실심(紛然失心) 이 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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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들은 진리를 밖에서 찾으려 애쓰지 말고, 안에서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심만 멈추라고 말합니다. 참됨은 본래 내 안에 있는데, 세상을 ‘옳다/그르다’, ‘좋다/싫다’는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 보기 때문에 어지러워질 뿐입니다. 이처럼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본래의 평화로운 마음은 저절로 드러난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 말한 ‘견해를 쉬는(息見)’ 수행의 핵심을 짚어줍니다. 그 핵심이란 바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두 갈래의 견해(二見), 즉 이원론의 틀 자체에 머물지(不住) 않는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이 ‘두 갈래로 보는 견해’를 ‘분별심(分別心)’의 뿌리로 봅니다. 이어서 구절은 한층 더 나아가, 그 견해를 바탕으로 ‘이미 있는 답을 좇아 추종하는 행위(追)’와 ‘새로운 답을 찾아 탐구하는 행위(尋)’ 모두를 삼가라고(‘慎莫’) 경고합니다. 진리에 대한 추종이든 탐구이든, 둘 다 ‘지금 여기’의 본래 마음을 벗어난, 분별심의 또 다른 활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토록 단호하게 경고하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 구절이 그 무서운 결과를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에 ‘아주 조금이라도(纔有)’,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是非)’는 판단이 싹트는 바로 그 순간, 고요했던 본래 마음(一心)은 깨지고, 그 틈에서 ‘나’와 ‘너’, ‘세상’과 ‘만물’이라는 온갖 분별의 세계가 어지럽게 펼쳐집니다(紛然). 그리고 우리는 그 어지럽게 흩어진 파편들을 좇아다니느라 평생을 소진하다가, 결국 자신의 참된 마음(本心)을 잃어버리고 마는(失心) 것입니다. 이처럼 ‘찰나의 시비(是非)’가 곧 ‘온 세상의 고통(紛然)’을 낳는 시작점임을 통렬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45구~제48구 #
二由一有 一亦莫守
이유일유 일역막수둘은 하나로 인해 있는 것이니, 하나 역시 지키지 말지니라.
▶ 이유일유(二由一有) 이니 일역막수(一亦莫守) 하라.
一心不生 萬法無咎
일심불생 만법무구그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것에 본디 아무런 허물이 없다.
▶ 일심불생(一心不生) 인즉 만법무구(萬法無咎)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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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가르침은 모든 분별을 넘어선 궁극의 지혜를 드러냅니다. 세상을 ‘나’와 ‘너’처럼 둘로 나누는 이원성은, 역설적으로 ‘하나’라는 통일성의 관념에 의지해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라는 절대적인 관념마저도 마음이 붙잡는 순간 마지막 집착이 될 뿐입니다. 궁극의 경지는 둘이라는 나뉨은 물론 하나라는 관념마저 일어나지 않는 자리입니다. 이처럼 세계를 판단하던 마음의 작용이 완전히 멈출 때, 비로소 세상 만물은 우리의 평가가 더해지지 않은, 본래 모습 그대로 아무 허물 없이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이 구절들은 분별의 가장 깊고 미세한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의 길을 제시합니다. 앞서 우리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싫음’ 같은 ‘두 가지 견해(二見)’를 버려야 함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둘’이라는 이원성(二元性)이 사실은 ‘하나(一)’라는 관념에 의지해서만 성립할 수 있음을 통찰합니다. ‘남’이 있으려면 ‘나’가 있어야 하듯, ‘둘’은 ‘하나’를 전제로 합니다.
또한 수행자는 종종 ‘둘’을 버리고 ‘하나(一)’라는 절대, 통일, 혹은 ‘한마음’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하지만 신심명은 이 ‘하나’마저도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莫守’) 경고합니다. ‘하나’에 머무는 것 역시, ‘둘’에 머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가장 미묘하고도 강력한 마지막 집착(法執)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경지는 ‘둘’을 버리고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라는 마음조차 일으키지 않는(‘一心不生’) 자리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판단하고 헤아리던 그 어떤 마음의 작용도 일어나지 않을 때, 비로소 세상 만물(萬法)은 우리의 평가와 판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됩니다. 산은 그저 산이요 물은 그저 물일 뿐,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그 어떤 ‘허물(咎)’도 본래부터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판단하던 ‘한마음’이 문제였음을 이 구절은 명백히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