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禪佛敎): Zen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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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 승찬 선사 – 신심명(信心銘) (4): 제49구~제64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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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


無咎無法 不生不心
무구무법 불생불심

허물이 없으면 ‘허물 닦는 데 필요할’ 불법이랄 것도 없으며,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지켜야 할 마음’이랄 것도 없다.

무구(無咎) 인즉 무법(無法) 이며 불생(不生) 인즉 불심(不心) 이로다.

能隨境滅 境逐能沈
능수경멸 경축능침

(그러한 ‘정말로 없음’의 자리에서는, 도리어 양처에서 모두 공덕을 얻어,) 주체는 대상을 따라가 소멸하고, 대상도 주체를 쫓아가 잠잠히 가라 앉는다.

▶ (그러한 ‘무구무법 불생불심’의 자리에서는) (能)수경멸(隨境滅) 하며 (境)축능침(逐能沈) 하니라.

– 완전한 무(無)의 극의에 도달한다.

– 앞(제25구)에서 양처실공(兩處失功)을 언급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서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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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분별하는 마음이 쉬어 세상에 허물이 없어진 경지를 설명합니다. 그 상태에서는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인 법(法) 또한 필요 없어집니다. 주관(‘能’)과 객관(‘境’)의 구분이 사라져, 주관이 사라지면 객관도 함께 사라지고 객관이 가라앉으면 주관도 함께 가라앉는, 주객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의 상태가 빈 상태이며, 또한 가득한 상태이기도 해서, ‘텅 빈 충만’이라고 소개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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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분별하는 마음이 쉬어 세상에 허물이 없어진 경지를 설명합니다. 그 상태에서는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인 법(法) 또한 필요 없어집니다. 주관(‘能’)과 객관(‘境’)의 구분이 사라져, 주관이 사라지면 객관도 함께 사라지고 객관이 가라앉으면 주관도 함께 가라앉는, 주객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의 상태가 빈 상태이며, 또한 가득한 상태이기도 해서, ‘텅 빈 충만’이라고 소개되기도 합니다.

境由能境 能由境能
경유능경 능유경능

대상은 주체로 말미암아 대상에 배대되고, 주체는 대상으로 말미암아 주체에 배대되니,

경(境)유능(由能) 하여 경(境) 이며, 능(能)유경(由境) 하여 능(能) 이니,

欲知兩段 元是一空
욕지양단 원시일공

그 두 갈래 조각이, 어디에서 갈라져 나온 조각들인지 알고자 하는가? 거슬러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어느 쪽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든, 모두, ‘하나의 텅 빈 허공(空)만이’ 있을 뿐이로다.

욕지양단(欲知兩段) 커든, 원(元) 은 (이것이 모두) 시일공(是一空) 이니라.

– 앞서 ‘견해로만 따지는 공(空)’에 대해 충분히 비판·평석(절차탁마)하였으므로, 그런 허물이 이후로는 더는 없을 것으로 간주하고 ‘공(空)이라는 허물 없는 말’을 자유·자재로이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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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주관과 객관이 서로를 조건으로 하여 성립하는 연기적(緣起的) 관계임을 밝힙니다. 주관이 있어야 객관이 있고, 객관이 있어야 주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의존하는 주관과 객관, 이 둘의 본래 바탕은 무엇인가 하면, 분별 이전의 자리인 ‘하나의 공(一空)’이라고 정의합니다.

一空同兩 齊含萬象
일공동량 제함만상

그 ‘하나의 텅 빈 허공(空)’ 결국 구르고 굴러 그 둘이 되는 것이고, 그 ‘하나의 텅 빈 허공(空)’이 그 갈라진 둘과 같은 것이니, 그 ‘하나의 텅 빈 허공(空)’이 결국 세상 만상을 가지런하게 모두 머금는 것이다.

속마음: 그 ‘하나의 텅 빈 허공(空)’ 결국 구르고 굴러 그 둘이 되는 것이고, 그 ‘하나의 텅 빈 허공(空)’이 그 갈라진 둘과 같은 것이니, 그 ‘하나의 텅 빈 허공(空)’이 결국 가지런히 세상 만상을 모두 머금기에, [그것이 곧 하나의 ‘종자’와도 같은 것이다.]

일공(一空)동량(同兩) 하야 제함만상(齊含萬象) 하나니

– 이미 이같이 공(空)에 대해 모르지 않으면서도, 앞서 도입부에 에둘러 ‘하나의 종자'(一種)라 표현했던 점들을 변론하고 있는 부분이다. 공이 본래로 색과 다르지 않고, 공이 본래로 색을 모두 머금는 까닭에, 공이 곧 종자이며, 이것이 지키는 측면(감각문 절제의 측면)에서는 ‘마음’이며, 유무를 떠난 측면에서는 ‘중도’인 것이다.

– ‘봐라, 머금지 않느냐.’ ‘그러니 ‘종자’라 표현한들 그것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알겠는가?’ ‘요령과 요결에 핵심이 있는 것이지, 단순히 어느 한 단어를 고집하는 것이 능수능란한 솜씨가 아닌 것이다’ 이런 말들을 승찬 선사는 하고 있는 것이다.

不見精粗 寧有偏黨
불견정추 영유편당

이미 본래의 마음이 미세하고 거친 것을 보지 않거늘, 어찌 편당지어 한쪽 견해에 치우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속마음: 공이라 하든 종자라 하든, 노납이 이미 세월이 묵어, 이미 본래의 마음이 미세하고 거친 것을 보지 않거늘(그것을 이미 알거늘), 노납이 정녕 고작 편당이나 짓겠다고 그런 억센 말들을 앞서 했겠는가.

불견정추(不見精粗) 어늘 영유편당(寧有偏黨) 이랴.

– 다만 차별상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면, ‘공이라는 견해’ 자체에 아무 허물이 없다.

– 앞서 비판한 까닭은, 불교 교리를 두고 서로 편당 지음을 ‘파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새로이 편당됨’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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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하나의 공(一空)’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가 아님을 설명합니다. 이 공은 주관과 객관(‘兩’)을 모두 포함하며, 나아가 세상의 온갖 현상(‘萬象’)을 평등하게 머금고 있는 바탕입니다. 이 공의 자리에서는 정교함과 거침(‘精粗’) 같은 분별이 없으니, 어느 한쪽을 편애하고 당파를 짓는(‘偏黨’) 마음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의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각, 즉 위 없는 ‘완전히 평평한’ 깨달음이라 한다는 점을 유심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大道體寬 無難無易
대도체관 무난무이

대도의 본질적 특성은 ‘크고 넓게 열려있는 것’이어서, 꼭 반드시 어렵다고 할 것도 없고, 꼭 반드시 쉽다고 할 것도 없느니라.

= 사실 대도의 본질적 특성이 ‘넓고 관대함’이거늘, 어려울 것이 따로 어디 있고, 쉬울 것이 따로 어디 있겠는가.

대도(大道) 체(體)() 이요 따라서(그 의미란) 무난(無難) 이며 무이(無易) 하거니와

– 즉, 그저 접근하는 이가 어렵게 하려거든 어렵게 하는 것이고, 그저 접근하는 이가 쉽게 하려거든 쉽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 그건(방편과 수단은), 그냥 각자 본인의, 타고난 취향 문제다.

– ‘공(空)’이라 하든, ‘한 종자(一種)’이라 하든, ‘마음(心)’이라 하든, 그러한 말들의 차별상은, 대도의 차별상과는 무관한 것이다. 대도는 무차별이요, 다만 사람이 그 방편을 취향껏 선택할 뿐이다. (이를 모르는 이들이 실참은 놔두고 방편을 두고 크다 작다, 높다 낮다 하며 싸우는 것이니, 이들은 실지 모두 도와 멀다. 물론 도는 가깝다. 그런데 이같이 생각하면 눈 앞에 있으면서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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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도(道)는 본래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그러므로 수행에 이르는 길 또한 어렵게 가든, 쉽게 가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이는 자신의 성향상 곧장 분별심을 끊고자 하여 ‘쉬운 길’을 따르고,
    어떤 이는 깊은 의혹을 풀고자 하여 ‘어려운 길’을 굳이 돌아가며 걷는다.
    그러나 빠르게 끊어도 도달은 곧 도달이요, 오래 돌아 끊어도 도달은 여전히 도달일 뿐이다.
    그러니 쉬움이 옳다거나 어려움이 더 값지다 말할 것도 없다.
    둘 다 다만 마음이 택한 방식일 뿐이며, 대도는 그 위아래를 가르지 않는다.

    “쉬운 수행도 방편이요, 어려운 수행도 방편이다.
    도에는 빠른 길도 없고 먼 길도 없다.
    다만 그대가 그렇게 믿는 만큼 길이 생겨날 뿐.”

    이것을 알아야 한다.

    깊은 철학을 공부하여 깨달은 이는, 깊은 철학이 필요한 이들을 잘 제도할 수 있다. 곧장 끊어 깨달은 이는, 당장 도에 들고자 하는 갈급한 이들을 잘 제도할 수 있다.

    마치 지혜제일 사리불과 두타제일 마하가섭은 모두 다 훌륭한 아라한이며, 문수와 보현, 관세음과 대세지가 다 저마다 특색이 다를 뿐 모두 훌륭한 보살들인 것과 같다.

    그러니 수행 방편을 닦는다는 것은, 다만 각각이 타고난 천성을 따라, 장차 ‘어떤 특색을 갖고, 어떤 방편으로, 어떤 중생들을 제도할 것인가?’의 차별이 있을 뿐이어서, 보살은 무릇, 방편에 차별을 두지 않고 두루 닦고 두루 성취함이 미덕이다. ‘법문무량 서원학’, ‘백천삼매 돈훈수’ 이런 말들을 잘 살펴 보라.

    이것이 아무리 백가지 방편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하나의 부처되는 수레만 있을 뿐이라 하는 ‘일불승’의 의미이다. 중생의 인연과 근기가 달라 차별상을 나투므로, 소승의 가르침이 필요한 이에게는 소승의 가르침을, 대승의 가르침이 필요한 이에게는 대승의 가르침을. 그렇다면 우리는 닦아 마친 이후에 소승의 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을 두루 차별 없이 섭렵해야 한다. 그것이 일불승의 대원만이다.

    – 약방에 갔는데, 약사가 ‘나는 배탈약만 지을 줄 알고, 감기약은 지을 줄 모른다’하면, 아픈 이가 어떻게 믿고 그 약방을 의지하겠는가? 하여 근기가 약한 보살은 배탈약만으로 제도하고, 감기약만으로 제도하겠지만, 부처는 원만하여, 중생의 숙세의 인연을 살펴 두루한 방편으로 제도한다.

    그러니 닦는 과정 중에도, 교설과 방편에 상호 우열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잘 맞는 것과 잘 맞지 않는 것이 있을 뿐이다.

小見狐疑 轉急轉遲
소견호의 전급전지

다만 그러한 크다란 대도 앞에, 고작 작은 견해를 하나 세워 ‘이거다’ ‘저거다’하며 여우같이 의심하길 거듭하면, 그 같은 사량분별을, 급하게 굴리면 굴릴 수록, 그 행위 자체가 도리어 ‘더디어감’을 급하게 굴리고 굴리는 일이 될 뿐이로다.

소견(小見) 으로 호의(狐疑) 커든 전급(轉急)전지(轉遲) 가 될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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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도의 본성은 광대하여(‘體寬’) 어렵고 쉬움(‘難易’)과 같은 상대적 분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이 좁은 소견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하고 여우처럼 의심하기 때문에(‘狐疑’), 깨달음을 향해 조급해할수록 오히려 본질에서 멀어지고 더뎌지는 결과를 낳게 됨을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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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on 12월 9,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