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승찬선사 신심명: 제65구~제68구 #
執之失度 必入邪路
집지실도 필입사로어떤 한 견해를 붙들면, 고정되어, 그 즉시 ‘살펴 헤아리는 작용’이 멈추는 고로, 반드시 바르지 못한 길에 빠지게 된다.
▶ 집지(執之) 하면 실도(失度) 하여 필입사로(必入邪路) 하나니라.
– 활발발함이 그치면 즉시에 죽는다. 굳어 고정되는 것이 곧 생사윤회요, 노사우비고뇌이기 때문이다.
放之自然 體無去住
방지자연 체무거주자기 작은 견해를 내려 놓아, (관대한 대도의 흐름에) 스스로 그러한대로 자연히 맡기어 두면,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로 그 대도로부터 떠남도, 또한 본래로 작은 견해에 머묾도, 없다.
▶ 방지(放之) 하여 자연(自然) 토록 하면, (보라) 체(體) 가 (본래) 무거주(無去住) 하니라.
– 잘 분별하여 보면, 우리 마음이 대도에 본래로 계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리와는 별개로 성립되는 현상’ 이라는 게 있을 수가 있겠는가?)
– 거주양난(去住兩難): 옛 고사에서 온 말이다. 원래는 전쟁이 나서 떠나는 이와 머무는 이 사이의 생이별을 일컫는다. 떠나고 머물고 하는 그런 생이별같은 간격 없이,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로 대도와 머묾도 떠남도 없이, 생이별 없이 그대로 하나라는 것이다.
해설 (클릭)
- 해설: 바로 앞 구절에서 언급된 ‘여우같은 의심과 좁은 소견’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 좁은 견해 하나를 진리인 양 움켜쥐면(執之), 마음의 활발한 생명력은 그 즉시 멈춰버립니다. 살아있는 강물이 얼어붙듯, 지혜롭게 세상을 ‘살펴 헤아리는’ 기능(度)을 잃고, 스스로 만든 생각의 감옥, 즉 삿된 길(邪路)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좁은 견해를 가벼이 내려놓고(放之) 스스로 그러한 대도의 흐름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면(自然),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본마음(體)은 단 한 번도 대도를 ‘떠난(去)’ 적도, 좁은 견해 속에 ‘머문(住)’ 적도 없다는 진실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去住兩難)한 적 없이 늘 함께 있었던 것처럼, 나와 도 사이에는 본래 아무런 간격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좁은 견해’를 놓아버리는 순간, 본래부터 하나였던 그 자리가 드러날 뿐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69구~제74구 #
任性合道 逍遙絶惱
임성합도 소요절뇌다만 본성에 맡기어 두면, 그대로 도에 합치되어, 자유로이 노닐면서도 모든 번뇌가 끊어지지만
▶ 임성(任性) 하면 합도(合道) 하여 소요절뇌(逍遙絶惱) 하지만
繋念乖眞 昏沈不好
계념괴진 혼침불호생각에 매여, 참된 것으로부터 어긋나고 단절되어 끊어지면, 한 생각에 갇힌 머리가 무겁고 혼미하고 침울해지며, 마음도 쾌활하지 못하고 영 불편해진다.
▶ 계념(繋念) 하여 괴진(乖眞) 하면 혼침불호(昏沈不好) 하니라.
不好勞神 何用疎親
불호로신 하용소친불편해진 마음은, 결국 정신(신명)을 소진되게 만들고 그만일 뿐인 것을, 온갖 견해들을 두고, ‘좋다’ ‘나쁘다’ 하며, 저 스스로의 멀고 가까움을 온통 재어 따진들, (대도에 있어서는) 그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랴.
▶ 불호로신(不好勞神) 이어늘 하용소친(何用疎親)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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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여기에는 우리 마음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 길은 억지로 애쓰지 않고 그저 자신의 본래 성품에 모든 것을 맡겨두는 ‘임성(任性)’의 길입니다. 이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저절로 도와 조화를 이루어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로우며 모든 번뇌가 자연스레 사라지는 평화를 누립니다. 다른 한 길은 특정한 생각이나 관념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계념(繋念)’의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를 참된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마음을 무겁고 어두운 혼돈 속에 가둡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불편하고 어두워진 마음 상태가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근원이 됩니다. 구절은 마지막으로 날카롭게 묻습니다. 이처럼 자기 안의 문제로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바깥세상을 향해 ‘저것은 나와 가까워 내 마음에 흡족하고, 이것은 나와 멀어 내 마음에 불편하다’ 하고 온통 재어 따지는 행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입니다. 결국 모든 외부적인 분별과 판단은, 적어도 우리가 여기서 따지려 하는 도(道)의 측면에서는, 그저 내면의 어지러움이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음을 통찰하게 합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75구~제80구 #
欲趣一乘 勿惡六塵
욕취일승 물오육진‘하나의 부처되는 수레’에 다다르고자 하거든, 여섯 감각 대상(六塵)을 미워하지 말지니라.
▶ 욕취일승(欲趣一乘) 인즉 물오육진(勿惡六塵) 할지니라.
六塵不惡 還同正覺
육진불오 환동정각여섯 감각 대상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바른 깨달음과 같아진다.
▶ 육진불오(六塵不惡) 하면 환동정각(還同正覺) 하나니
– 반복적인 믿음대로 믿지 말고, 실제의 감각을 살펴, 다시 사실대로 여실히 분별하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육진을 살피는 여섯 감각 기관을 ‘청정색’이라 표현하곤 하는데, 육진과 감각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다른 것을 보고도 모두 같은 것이라 판정하고 있는 그 ‘마음’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 ‘일일신 우일신’ 같은 말을 ‘신년 인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실은 그 말은 단 한 순간도 같은 순간이란 없다는 말이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듯, 모든 감각정보, 나아가 뉴스 같은 것도, 기존의 내 시각을 버리고 봐야 참답게 사실적으로 볼 수가 있다. 그것을 떠나서 별스러운 곳에 따로이 불법의 도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智者無爲 愚人自縛
지자무위 우인자박지혜로운 자는 인위적인 함이 없이 대도에 머물러 자유로이 노닐건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늘 스스로를 속박시켜, 모든 속진의 고통을 다 제 것으로 삼아, 스스로 그 고통을 당하느니라.
▶ 지자(智者) 는 무위(無爲) 컨만 우인(愚人) 이 자박(自縛) 하니라.
해설 (클릭)
- 해설: 이 구절들은 깨달음을 향한 길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우리는 종종 진정한 깨달음(一乘)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현실(六塵)을 떠나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생생한 감각의 세계를 번뇌의 근원으로 여기고 미워하며 벗어나려 애씁니다. 하지만 신심명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현실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바른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말입니다.
결국 지혜로운 자(智者)와 어리석은 자(愚人)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납니다. 지혜로운 이는 현실을 억지로 바꾸거나 거부하려 하지 않기에, 아무런 인위적인 행위 없이(無爲) 자유롭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이는 바로 이 현실이 깨달음의 재료임을 알지 못하고, ‘이것은 싫다, 저것은 더럽다’며 스스로를 분별의 밧줄로 꽁꽁 묶습니다(自縛). 세상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미워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를 늘 속박하여 모든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