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승찬선사 신심명: 제81구~제84구 #
法無異法 妄自愛着
법무이법 망자애착불법이라 하여 달리 별난 법이 있는 게 아니나, 제 스스로 망령되이 이 법 저 법을 찾아 사랑하고 집착하여,
▶ 법무이법(法無異法) 하나 망자애착(妄自愛着) 하여
將心用心 豈非大錯
장심용심 기비대착이는 마치, 이미 대도에 잘 계합한 마음을 지니고서, 달리 또 어거지 마음을 만들어 사용하려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 큰 오판(like 경기도 오산)이 아니겠는가?
▶ 장심용심(將心用心) 이니 기비대착(豈非大錯) 이랴. (어찌 아니 대착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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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은 수행에 있어 가장 저지르기 쉬우면서도 근본적인 착각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 여기의 평범한 마음 외에, 깨달음을 위한 어떤 ‘특별한 법’이나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따로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이 법과 저 법 같은 구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망령된 생각을 일으켜 ‘이 수행법이 더 좋다’, ‘저 경전이 더 뛰어나다’며 자신만의 기호를 만들어 사랑하고 집착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착오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미 완전한 본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불신하고 ‘수행하는 마음’이라는 또 다른 억지 마음을 만들어 본래 마음을 조종하려는 모순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어떻게 하려는(‘將心用心’) 이 어긋난 노력 자체가 바로 도와 멀어지는 길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85구~제90구 #
迷生寂亂 悟無好惡
미생적란 오무호오헤메느라 알지 못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 등 각종 차별상 다 생겨나지만, 어느날 활연히 알고 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은 커녕) 더 근본적인 ‘좋고 싫음’도 본래 없다.
▶ 미생적란(迷生寂亂) 이나 오무호오(悟無好惡) 라.
一切二邊 妄自斟酌
일체이변 망자짐작일체의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의 모든 상대적인 관념적 구분이, 다 결국에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요, 망령되이 제 요량껏 이렇게 저렇게 짐작하는 것에 불과하니,
▶ 일체이변(一切二邊) 이 망자짐작(妄自斟酌) 이니
夢幻空華 何勞把捉
몽환공화 하로파착꿈과 허깨비, 눈병으로 인해 보이는 허공의 잔상 꽃과 다를 바 없는 그것들을, 어찌 전부 따라다니며 붙들어 잡으려는 수고를 해야 하겠는가?
▶ 몽환공화(夢幻空華) 를 하로파착(何勞把捉)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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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며 괴로움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고 헤맬 때(迷), 마음은 저절로 세상을 ‘고요함’과 ‘어지러움’, ‘깨끗함’과 ‘더러움’ 같은 온갖 대립되는 쌍으로 나누어 버립니다. 하지만 문득 깨닫고 보면(悟), 그런 대립은 물론이고 그 모든 분별의 뿌리가 되는 ‘좋고 싫음(好惡)’이라는 감정조차 본래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인 구분(一切二邊)은 결코 객관적인 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마음이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망령되게 판단하고 짐작한(妄自斟酌)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토록 붙잡으려 하거나 밀어내려 하는 모든 관념들은, 실은 꿈속의 일이나 허공에 어른거리는 꽃(夢幻空華)처럼 헛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절은 우리에게 자비롭게 묻습니다. 이처럼 본래 텅 비어 잡을 수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고, 어찌하여 이토록 고단한 수고를 평생 계속해야만 하겠냐고 말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91구~제94구 #
得失是非 一時放却
득실시비 일시방각득실과 시비를 전혀 조금도 주저 말고 일시에 놓아버릴지니
▶ 득실시비(得失是非) 를 일시방각(一時放却) 할지니
眼若不睡 諸夢自除
안약불수 제몽자제만약 이처럼 닦아 두 눈이 (둔중하게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다면, 사실을 놓치고 꿈과 뒤바뀌게 된 견해는, 저 스스로 다 사라지는 것이니라.
▶ 안약불수(眼若不睡) 면 제몽자제(諸夢自除) 니라.
– 오해 말아야 할 것은, ‘수행을 닦을 때’의 요령이 이렇다는 것이지, 속세의 생활을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다.
– 속세의 생활규범이나 사회의 도덕규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수행하는 순간의 명상 요결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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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은 단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수행의 결단과 그 필연적인 결과를 보여줍니다.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는 ‘이익과 손해(得失)’의 저울질, 그리고 ‘옳음과 그름(是非)’의 날 선 칼날을, 더 이상 미련 두거나 주저하지 말고 단칼에 놓아버리라(一時放却)고 촉구합니다. 이는 점진적인 개선이 아닌,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는 결단입니다.
이처럼 주저 없이 놓아버리는 수행을 통해 마음의 눈을 계속해서 닦아 나간다면(닦아 眼若不睡), 그 결과는 놀랍도록 자연스럽습니다. 우리의 그릇된 견해와 망상이라는 온갖 꿈들(諸夢)은 우리가 애써 싸워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밝게 깨어있는 마음의 눈 앞에서는, 마치 빛 앞에서 어둠이 그러하듯, 저절로(‘自除’) 물러나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꿈의 내용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의 눈을 맑게 닦는 수행을 멈추지 않는 것뿐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95구~제98구 #
心若不異 萬法一如
심약불이 만법일여만약 마음에 다른 모양을 세우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같아지는 것이다.
▶ 심약불이(心若不異) 하면 만법일여(萬法一如) 하며
一如體玄 兀爾忘緣
일여체현 올이망연‘모두가 하나로 같다’는 것의 본질적 특성이, 참으로 현묘(심오)하여, 이에 마음의 심지가 우뚝허니 세워지고, 초연해져 모든 의혹과 의심을 끊고, (다시는 의심할 것 없이) 문득 모든 인연을 잊게 되느니라.
▶ 일여(一如) 의 체(體) 가 현(玄) 하여, 올이(兀爾) 로, [올(兀) 함으로 인해(爾)], 망연(忘緣) 케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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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앞서 분별의 잠에서 깨어나는 길을 보았다면, 여기서는 깨어난 눈으로 본 세계의 모습과 그 결과 얻게 되는 마음의 상태를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먼저 세상을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 다르게 보지만 않는다면(心若不異), 세상 만물은 본래 모습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처럼 조화롭고 한결같습니다(萬法一如). 세상이 분열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나누어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라는 체험(一如)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고 현묘한(玄) 경지입니다. 이 깊은 체험을 통해, 비로소 우리 마음의 중심(心志)이 외부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산처럼 우뚝 서게 됩니다(兀爾). 이렇게 굳건한 평정심이 세워졌기 때문에, 우리는 마침내 좋고 싫음으로 얽혀 있던 모든 인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문득 잊게 됩니다(忘緣). 더 이상 세상의 조건과 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완전한 내적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99구~제102구 #
萬法齊觀 歸復自然
만법제관 귀복자연(그러나 그러하더라도, 그러한 올연(兀然)함에 빠지지 말고), 다시 세상 만물을 일관되이 고르고 가지런하게 관찰하여, ‘스스로 그러할 뿐’인 평평하고 자연스러운 진리의 당체로 다시 완전히 되돌아가고 나면,
▶ 만법제관(萬法齊觀) 하여 귀복자연(歸復自然) 하면
泯其所以 不可方比
민기소이 불가방비그렇게 된 까닭, 거기까지 이끌어 준 사연, 즉 초연케 했던 올연(兀然)함도 ‘무던히 평평해져’ 종적 없이 자취를 찾을 수 없게 사라지니, (완전히 없고 또 없어서), 여기에 이르러서는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고 헤아릴’ 방도 자체가 없게 되느니라.
그렇게 된 까닭, 거기까지 이끌어 준 사연, 즉 초연케 했던 올연(兀然)함도 ‘무던히 평평해져’ 종적 없이 자취를 찾을 수 없게 사라지니, (완전히 없고 또 없어서), 여기에 이르러서는 ‘이것과 저것을 헤아려 견주고 비교할’ 방도 자체가 없게 되느니라.
온갖 이러쿵 저러쿵 분별시비하던 그 각각의 모든 이유와 원인들이 종적 없이 자취를 찾을 수 없게 사라지니, (완전히 없고 또 없어서), 여기에 이르러서는 이것과 저것을 헤아려 견주고 비교할 방도(可) 자체가 없게 되느니라.
▶ 민기소이(泯其所以) 하여 불가방비(不可方比) 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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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들은 깨달음의 여정 막바지에 있는 미묘한 함정과 그것을 넘어선 궁극의 경지를 노래합니다. 앞서 우리는 의심을 벗어나 마음이 산처럼 우뚝 서는 ‘올연(兀然)’의 경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 위대한 체험조차도 머물러야 할 목적지가 아님을 경고합니다. 그 고요한 산 정상에 안주하지 말고, 다시 세상 만물을 차별 없는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보아(萬法齊觀), 특별할 것 없는 본래의 자연스러움(自然)으로 완전히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렇게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르고 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를 그 경지로 이끌어주었던 ‘그렇게 된 까닭(所以)’, 즉 강을 건너게 해 준 뗏목이었던 ‘올연’의 체험마저도 그 자취를 감추고 녹아내립니다(泯). 산 정상은 사라지고 드넓은 평야만 남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도, 길을 가던 나도, 이정표도 모두 사라진 온전한 바탕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무엇과 무엇을 견주어 헤아리는(方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모든 비교와 분별이 근원적으로 쉬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