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승찬선사 신심명: 제103구~제106구 #
止動無動 動止無止
지동무동 동지무지(고요함과 움직임 둘 사이를 두고 정중동이니 동중정이니 말이 참 많으나), ‘멈춰 있는 것의 동작’이란 그저 ‘움직이지 않는다(=멈춰 있다)’일 뿐이요, ‘움직이는 것이 머무는 상태’란 그저 ‘멈춰 있지 않다(=움직인다)’일 뿐인 것이다.
▶ 지동(止動) 은 무동(無動) 이요 동지(動止) 는 무지(無止) 어니,
兩既不成 一何有爾
양기불성 일하유이그것들은 다 말장난일 뿐이요, 실제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니, 어느 것을 두고 참다웁게 ‘있다’ 하리요?
▶ 양기불성(兩既不成) 이니 일하유이(一何有爾) 리요?
해설 (클릭)
- 해설: 이 구절은 깨달음에 대한 현학적인 말장난과 지적인 유희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선(禪)의 예리한 칼날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종종 ‘고요함 속의 움직임’이니 ‘움직임 속의 고요함’이니 하며 심오한 듯한 개념들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사실로 그 모든 언어의 거품을 걷어냅니다. ‘멈춤의 움직임(止動)’이란 결국 ‘움직임이 없음(無動)’일 뿐이며, ‘움직임의 멈춤(動止)’이란 결국 ‘멈춤이 아님(無止)’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요함 속 움직임’과 ‘움직임 속 고요함’이라는 두 가지 개념(兩) 자체가 실체 없이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한데, 그중 어느 하나(一)를 붙잡아 ‘이것이 진리다’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냐고 통렬하게 되묻습니다. 이는 진리를 복잡한 개념의 틀에 가두려는 모든 시도를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개념의 유희를 멈추고, 언어 이전의 살아있는 실체로 곧장 돌아오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107구~제110구 #
究境窮極 不存軌則
구경궁극 부존궤칙다해 마친 궁극적인 경계에서는, 따로이 모범을 세워 두고 따라야 할 규칙같은 것이 존재하질 않는다.
▶ 구경궁극(究境窮極) 은 부존궤칙(不存軌則) 하니
契心平等 所作倶息
계심평등 소작구식평등한 마음에 계합하면, 삼독심을 따라 나가 뭐든 하려던 ‘짓는 마음’ 자체가 이미 모두 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미 따로이 모범이 필요하지 않다. 그 스스로 그 자리에 잘 머물면 될 뿐.)
▶ 계심평등(契心平等) 이 소작구식(所作倶息) 고라.
– 그리하여 이미 따로이 모범이 필요하지 않다. 그 스스로 그 자리에 잘 머물면 될 뿐.
해설 (클릭)
- 해설: 이 구절은 깨달음의 여정이 끝나는 궁극의 경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최종 목적지에 이르면, 우리를 이끌어주던 모든 이정표와 법칙(軌則), 즉 ‘이렇게 해야 한다’ 또는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모든 규범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도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규칙 없이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마음이 모든 것을 차별 없이 바라보는 완전한 ‘평등(平等)’의 상태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등심에 온전히 계합하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따라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고 짓고 행하려던’ 마음(所作)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자체가 완전히 멈추게(倶息) 됩니다. 말썽을 부릴 마음의 동기 자체가 사라졌는데, 그것을 제어할 규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존재 자체가 이미 길이 되고 법칙이 되었기에, 그 어떤 외부의 기준도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111구~제114구 #
狐疑淨盡 正信調直
호의정진 정신조직여우같은 의심이 말끔히 사라져, 이제야 진실로 ‘바른 확신’이 갖춰지고 굳세어지기에
▶ 호의정진(狐疑淨盡) 하여 정신조직(正信調直) 하니
一切不留 無可記憶
일절불류 무가기억이제 분별시비일랑 일절 남겨두길 허용치 않게 되니, 하루 중에 기억할 만한 특별한 일도 없게 된다. (여기에 가야 일상 속에, 그냥 세수하고 밥 먹는 것으로, 고작 모든 도가 이루어진다.)
▶ 일절불류(一切不留) 하여 무가기억(無可記憶) 이니라.
– 여기에 가야 일상 속에, 그냥 세수하고 밥 먹는 것으로, 모든 도가 이루어진다.
해설 (클릭)
- 해설: 이 구절들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가 어떻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우리를 가장 교묘하게 괴롭히던 ‘이 길이 맞나?’, ‘나는 제대로 하고 있나?’와 같은 여우같은 의심(狐疑)이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 텅 빈 자리에, 억지로 믿는 신념이 아닌,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고요하고 올곧은 확신(正信)이 저절로 굳건하게 바로 섭니다.
이렇게 마음의 중심이 바로 서면, 더 이상 세상을 ‘옳다/그르다’ 혹은 ‘좋다/나쁘다’로 나누어 마음에 담아두는(不留) 일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매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뿐, 어제의 잘한 일이나 오늘의 실수 같은 것을 붙잡아 곱씹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루가 지나도 ‘특별히 기억할 만한’ 좋고 나쁜 사건(無可記憶)이 없는, 그저 물 흐르듯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정점입니다. 세수하고 밥을 먹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무런 특별함 없이, 온전한 도가 이루어지는 경지인 것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115구~제118구 #
虛明自照 不勞心力
허명자조 불로심력알겠는가? 텅 빈 밝음이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의 노고를 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허명자조(虛明自照) 하여 불로심력(不勞心力) 이니라.
非思量處 識情難測
비사량처 식정난측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인식과 감정으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겉으로 보아선 영 재미가 없으나, 당사자로서는 한 시도 멈춰 있지 않고, 늘 도가 앞으로 나아가는, 재미가 있다. 아무 재미가 없고, 그리고 모든 재미가 있다.)
▶ 비사량처(非思量處) 가 식정난측(識情難測) 이니라.
– 겉으로 보아선 영 재미가 없으나, 당사자로서는 한 시도 멈춰 있지 않고, 늘 도가 앞으로 나아가는, 재미가 있다. 아무 재미가 없고, 그리고 모든 재미가 있다.
해설 (클릭)
- 해설: 이 구절들은 마침내 드러난 본래 마음의 성품과 그 경지를 노래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밝게 빛나는(虛明)’ 거울과 같습니다. 이 거울은 우리가 애써 닦거나 비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본래의 성품에 따라 스스로(自) 세상을 비춥니다(照). 그렇기에 더 이상 깨닫기 위해 마음의 힘을 쥐어짜는 고된 노력(勞心力)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노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마음의 참된 기능이 저절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경지는 우리의 생각이나 논리(‘思量’)로 도달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지식적인 인식(‘識’)이나 희로애락의 감정(‘情’)으로도 그 깊이를 결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겉에서 보면, 아무런 극적인 사건도 감정의 기복도 없는 이 상태는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좋고 나쁜 ‘재미’는 사라졌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시시각각 도의 흐름과 함께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깊은 ‘재미’가 있습니다. ‘아무 재미가 없기에, 비로소 모든 재미가 있는’ 역설의 경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