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승찬선사 신심명: 제119구~제122구 #
眞如法界 無他無自
진여법계 무타무자참된 여여함의 세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 진여법계(眞如法界) 가 무타무자(無他無自) 하니
要急相應 唯言不二
요급상응 유언불이속히 상응코자 한다면, 오직 ‘둘이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 요급상응(要急相應) 이어든 유언불이(唯言不二) 로다.
– 要(요): 원하다, 바라다, ~하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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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들은 깨달음의 궁극적인 경지와 그곳에 이르는 가장 핵심적인 길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진리가 온전히 드러난 세계, 즉 ‘참된 여여함의 세계(眞如法界)’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곳은 바로 ‘나(自)’와 ‘남(他)’이라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견고한 분별의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자리입니다. ‘나’라는 주체와 ‘세계’라는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 절대 평등의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광대무변한 본래의 고향에 ‘속히 이르는(要急相應)’ 지름길은 무엇일까요? 가르침은 놀랍도록 단순명쾌합니다. ‘오직 둘이 아님(不二)을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불이(不二)’는 신심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진리이자, 모든 분별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지혜의 검입니다. 좋고 싫음, 옳고 그름, 삶과 죽음, 그리고 마침내 ‘나’와 ‘남’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모든 이원론적 대립은 ‘둘이 아님’이라는 이 하나의 통찰 앞에서 모두 힘을 잃고 본래의 하나로 돌아옵니다. 이 ‘불이’의 이치에 투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곧장 진리의 세계와 상응하게 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빠른 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123구~제126구 #
不二皆同 無不包容
불이개동 무불포용둘이 아니고 모두 같다면, 포용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 불이개동(不二皆同) 하면 무불포용(無不包容) 하니
十方智者 皆入此宗
시방지자 개입차종온 세상 지혜로운 모든 이들이, 다 이러한 근본 취지에 들어오게 된다.
▶ 시방지자(十方智者) 가 개입차종(皆入此宗)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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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들은 ‘둘이 아님(不二)’이라는 위대한 통찰이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너’와 ‘나’,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던 분별의 벽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본래 하나로 같음(皆同)을 진실로 보게 될 때, 우리 마음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그 마음은 우주만큼 넓어져, 그 어떤 존재나 현상도 밀어내거나 거부할 수 없게 됩니다(無不包容). 미워해야 할 ‘남’이 없고, 버려야 할 ‘세상’이 없으니,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껴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가 실현된 대자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결코 외롭거나 특이한 길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 온 우주(十方)의 모든 지혜로운 이들(智者)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예외 없이 바로 이 ‘둘 아닌’ 근본 자리(此宗)로 들어왔습니다. 이는 ‘불이’의 통찰이야말로 모든 깨달은 이들이 공통으로 밟고 선, 유일하고도 가장 보편적인 진리의 바탕임을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127구~제130구 #
宗非促延 一念萬年
종비촉연 일념만년그 근본적 취지에서는, 재촉함과 지연됨, 즉 빠르게 느껴지거나 느리게 느껴지는 바가 없으니, 한 생각이 곧 만 년이다.
▶ 종비촉연(宗非促延) 하여 일념만년(一念萬年) 이니
無 在不在 十方目前
무 재불재 시방목전또한 ‘있음’도 ‘있지 않음’도 없으니, 온 세상이 기다림 없이 그대로 눈 앞에 현전하니라.
▶ 무재불재(無在不在) 하여 시방(十方) 이 목전(目前)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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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들은 ‘둘 아닌 근본 자리(宗)’가 우리의 상식적인 시공간 개념을 어떻게 초월해 있는지를 장엄하게 노래합니다. 먼저, 그 근본의 세계에는 ‘시간’이라는 잣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빠름(促)’과 ‘느림(延)’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급해하고 지루해하지만,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깨달음의 찰나(‘一念’)와 영겁의 세월(‘萬年’)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영원 전체와 맞닿아 있으며, 그 안에서 모든 시간은 하나로 녹아내립니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과 존재의 개념마저 무너집니다. 우리는 늘 ‘있다(在)’와 ‘없다(不在)’라는 분별 속에서 헤매지만, 진리의 본체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규정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있음’에 고정되어 있지도, ‘없음’에 빠져 있지도 않기에, 진리는 ‘저 멀리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찾아 헤매던 광활한 우주(十方)는 단 한순간의 기다림도 없이, 바로 지금 여기 내 눈앞(目前)에 온전히 현전(現前)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도는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것을 ‘보는’ 것일 뿐입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131구~제134구 #
極小同大 忘絶境界
극소동대 망절경계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으니, 더 이상 바깥의 경계는 모두 끊어지고 없게 된다.
▶ 극소동대(極小同大) 하니 망절경계(忘絶境界) 로다.
– 비교 분석하여 이거다 저거다 하며 선호와 불선호를 갖고 취사선택하는 중생심이 쉬게 된다는 것이다.
– 멍청하니 바보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도 주어진 그것으로 해내고 넘쳐도 주어진 그것으로 해낸다는 것이다. 대도의 힘이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고난들을 뚫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팔정도’의 삶이다.
極大同小 不見邊表
극대동소 불견변표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그 변두리(테두리)와 껍데기의 곱고 미운 제각각의 변화상들을 모두 보지 않는다.
▶ 극대동소(極大同小) 하니 불견변표(不見邊表) 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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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들은 ‘비교’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마음이 바라보는 장대한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크기’라는 가장 근본적인 분별의 타파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과 ‘지극히 큰 것’이 본질에서 같음(同)을 꿰뚫어 볼 때, 우리가 세상을 조각내던 모든 경계선(境界)들이 그 의미를 잃고 끊어집니다(忘絶).
하지만 이 ‘경계를 잊음’은 결코 멍청하거나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는 끊임없이 ‘이것과 저것’을 재고 따지던 분별심(중생심)이 비로소 쉬게 됨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자란다’, ‘저것은 넘친다’는 계산이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주어진 그것’이 모자라든 넘치든 상관없이, 그저 주어진 조건으로 모든 것을 해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대도의 힘이며, 활발발한 ‘팔정도’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이 경지를 확증합니다.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우리는 더 이상 사물의 ‘변두리나 껍데기(邊表)’에 속지 않게 됩니다. 크고 작음이라는 근본 분별에서 벗어났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나 추함 같은 피상적인 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