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祖 僧璨 禪師 – 信心銘 #
삼조 승찬 선사 – 신심명
승찬선사 신심명: 제135구~제138구 #
有卽是無 無卽是有
유즉시무 무즉시유있는 즉 이것이 없음이요, 없는 즉 이것이 있음이로다.
▶ 유즉시무(有卽是無) 요 무즉시유(無卽是有) 니
若不如是 必不須守
약불여시 필불수수만일 이와같지 않을진댄, 구태여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
▶ 약불여시(若不如是) 어든 필불수수(必不須守) 니라.
– 須(수): 필요하다 · 반드시 ~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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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은 불교 사상의 정점이자, 모든 분별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있음(有)’과 ‘없음(無)’을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두 개의 실체로 보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있음’의 본질이 바로 ‘없음(空)’이며, 그 ‘없음’이라는 바탕이 있기에 ‘있음’이 현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정확히 같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구절은 이 위대한 선언에 대한 지적인 집착마저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만약 이 “있음이 곧 없음”이라는 이치가 그대의 삶 속에서 진실로 체득되지 않고, 그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나 신념에 불과하다면(若不如是), 그 말을 억지로 붙잡고 ‘지킬(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심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하는 ‘철저한 실증(實證)’의 정신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가르침이라도 그것이 나의 생생한 체험이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가 버려야 할 또 하나의 ‘견해’이자 ‘집착’에 불과함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승찬선사 신심명: 제139구~제142구 #
一卽一切 一切卽一
일즉일체 일체즉일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
▶ 일즉일체(一卽一切 ) 요 일체즉일(一切卽一) 이니
但能如是 何慮不畢
단능여시 하려불필다만 이와 같을 수만 있다면, 어찌 마치지 못할 것을 걱정하랴.
▶ 단능여시(但能如是) 라면 하려불필(何慮不畢)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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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이 구절은 ‘있음’과 ‘없음’의 분별마저 넘어선 자리에 펼쳐지는 장엄한 진리의 세계를 노래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一卽一切 一切卽一)’라는 화엄의 소식입니다. 티끌 하나 속에 온 우주가 담겨 있고, 온 우주가 티끌 하나와 다르지 않다는 이 통찰은, ‘나’라는 개체와 ‘세계’라는 전체, ‘수행자’와 ‘깨달음’ 사이에 그 어떤 간극이나 분리도 본래 존재하지 않았음을 최종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렇기에 ‘다만 이와 같을 수만 있다면(但能如是)’, 즉 이 진리를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나의 온전한 실체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까’하는 그 어떤 걱정(何慮)도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마친다(畢)’는 생각 자체가, ‘깨닫지 못한 나’와 ‘깨달아야 할 저편’이라는 분리된 관념 속에서만 싹트는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본래 하나이며 이미 완전함을 아는 그 자리가 바로 ‘마침(畢)’의 자리입니다. 걱정할 ‘나’도, 도달해야 할 ‘목표’도 이미 사라졌는데, 어찌 근심이 남아 있겠습니까?
승찬선사 신심명: 제143구~제146구 #
信心不二 不二信心
신심불이 불이신심믿는 마음은 둘이 아닌 마음이며, 둘이 아닌 마음이 곧 믿는 마음이다.
▶ 신심불이(信心不二) 며 불이신심(不二信心) 이니
言語道斷 非去來今
언어도단 비거래금이에 말과 생각의 길이 모두 끊어지니, 과거나 미래가 아님은 물론이요, 지금 여기 현재 또한 아니로다.
▶ 언어도단(言語道斷) 하여 비거래금(非去來今)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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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마침내 ‘신심명(信心銘)’이라는 장대한 여정은 그 종착지에서, 이 시의 제목이자 결론인 ‘신심(信心)’의 참뜻을 밝히며 장엄한 결론을 맺습니다.
진정한 ‘믿는 마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라는 주체와 ‘진리’라는 객체를 나누어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는 이원론적 행위가 아닙니다. ‘믿는 나’와 ‘믿음의 대상인 진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구분이 완전히 무너져 하나가 된 상태, 즉 ‘둘이 아님(不二)’을 아는 그 비분별의 마음입니다.
‘둘 아님’을 온전히 체득한 것이 곧 ‘믿음’이며, 진정한 ‘믿음’은 이미 ‘둘 아님’의 경지 그 자체입니다. 둘 아닌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둘 아님을 아는 것이 곧 믿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는 믿음과 깨달음이 마침내 하나가 되는 궁극의 자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 아닌 믿음’의 자리는 어떤 곳일까요? 그곳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즉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로 시작했던 그 모든 말과 생각, 개념과 논리의 길이 완전히 끊어진 자리입니다. 세상을 재단하고 분별하던 모든 것이 쉬어버린 완전한 침묵의 세계입니다.
또한 그곳은 비거래금(非去來今), 즉 ‘시간’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분별마저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곳은 지나간 ‘과거’도, 다가올 ‘미래’도 아닙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토록 붙잡으려 하거나 머무르고자 애썼던 ‘지금 여기 현재(今)’라는 개념마저도 넘어선 자리입니다. ‘지금’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와 미래라는 분별에 기댄 또 하나의 관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시간의 분별마저 사라진, 시간이라는 강물이 흐르는 영원한 바탕, 그 ‘텅 빈 근원의 자리’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장엄한 침묵의 선언입니다. 이처럼 ‘신심명’은 그 어떤 개념으로도 잡을 수 없는 영원하고도 생생한 진리의 본체를 드러내며 그 대장정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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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근래에 ‘지금 여기’ 같은 말이 세간에 유행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가에서는 앞서 둘이 아님은 물론이거나와, 하나조차 지키지 말라 말을 합니다. ‘지금 여기’는 과거와 미래를 배격하는 좋은 방편이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 집착하는 것 또한, 본지의 풍광으로서는 인정되기가 어려운 경치입니다.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꿈에 지나치게 혹사당하는 사람에게는 더러 ‘지금 여기’같은 말이 유용하겠습니다만은, 그렇다고 또 새로이 경향이 굳어져 ‘지금 여기’를 만능 열쇠와 같이 취급하기 시작한다면, 거기에서부터 또 다시 본성과 어긋나는 ‘이거다’ 커나 ‘저거다’ 커나 하는 집착이 발생하고, 분별시비를 통해 고통이 생겨납니다. 그렇기에 과거나 미래가 아님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 현재조차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이 대목에 이런 말들을 하시죠. “알겠는가? 억!” 그런데 억! 하고 외친 그 소리도, 지금 한 순간에 맞았을 지언정, 돌이켜 검토하면 또 어긋나 있습니다. 그러나 흘려 보내고, 다만 모름지기 견해를 쉬면, 문득 계합합니다. 만법은 허물 없고, 도는 늘 활연합니다. 매 순간 우리 눈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