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 (雜阿含經, Saṃyukta-āgama, Goryeo no.650, Taishō no. 99) #
– 송(宋)나라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문 번역 (宋天竺三藏求那跋陁羅 譯)
– 대한민국 문수도량 세속문파 해밀문(解密門) 문주 해밀장(解密長: 속명 법준法俊 필명 다르마슈레야Dharmaśreyaḥ) 한글 번역 및 해설
잡아함경 제1번경 (SĀ-1) :《관색무상경(觀色無常經)》 #
“물질(色)을 무상한 것으로 보라는 가르침”
잡아함경 제1번경 – 관색무상경(觀色無常經) #
如是我聞: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일시, 불주사위국기수급고독원.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머물고 계셨다.
爾時, 世尊告諸比丘:
이시, 세존고제비구:
그때 부처님께서 여러 수행승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當 觀 色 無常
당 관 색 무상
응당 육신을 관찰하여 ‘무상한 것’으로 보라.
▶ *무상(無常): 항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무상의 반댓말은 ‘영원불변’이다. 즉 ‘무상하다’라는 말은 ‘영원불변하지 않다’라는 말이다. 지금의 상태가, 영원하지 않고, 항구불변하지 않으며, 심지어 아예 매 순간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육신을, 잘 관찰하여, 영원하지 않으며, 불변하지 않으며, 유한하고, 심지어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관찰해 내라는 뜻이다.
如是觀者 則爲正觀
여시관자 즉위정관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 *정관(正觀): 바른 관찰.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른 관찰’이라는 말은, 이것이 모든 관찰 행위(관법 수행)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수천년이 바뀌고, 종파가 무수히 새롭게 생겨나도, 여기에 부합하면 그것이 불교이고, 여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正觀者 則生厭離
정관자 즉생염리
‘육신은 무상하다’하고 바르게 관찰하면,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늙고 병들어 쇠락해 가는 육신에 대해, 비록 잠시 잠깐 아름답다 해도, 그 무상함에 의지할 바 없어, 진리가 아니어서, 반드시 질리고 염증나서 멀리하게 되고,
厭離者 喜貪盡
염리자 희탐진
육신에 질리고 염증나서 멀리하게 되면, 육신의 아름다움을 반겨하고 탐하여 즐기려는 마음이 다하게 된다.
▶ *색(色): 물질, 육신, 특히 ‘아름다운 육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물질로 해석하지 않고 ‘육신’ 혹은 ‘아름다운 육신’으로 해석한 것은, 이 설법이 이미 세속을 떠난 출가 수행승들을 향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의 재산이나 신분 관계를 이미 놓아버렸으므로, 가진 것 하나라곤 몸뚱이 뿐이다. 그러니 홀로 머물며 관법을 닦을 때에, 그 몸땡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아 이 몸땡이 영원한가 했더니 젊음은 금세 시들 것이요 아름다운 모습은 오간 데 없다. 어린 시절 모습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졌고, 슬금슬금 주름살이 늘어간다. 병들면 곤란하고 늙으면 쇠약하니, 이 몸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질 않고 사람을 괴롭게 한다. 몸이란 무상하구나. 물론 ‘물건’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 어떤 물질도 영원불변하는 바란 없다. 그 ‘무상한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하는 관찰을 하라. 그러한 관법 수행을 닦으라.
喜貪盡者 說心解脫
희탐진자 설심해탈
아름다운 육신을 반겨하고 탐하여 즐기려는 마음이 다하게 되면, 이것을 ‘마음이 육신으로부터 해탈했다’고 말한다.
▶ 육신의 영원하지 않음을 사실 그대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내 몸도 그러한데, 내 몸도 아닌 다른 물질들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물질의 무상함을 열심히 관찰하여, 염리심이 나고, 그로 인해 희탐심이 멸하면, 물질로부터 심해탈하는 것이다.
如是 觀 受想行識 無常
여시 관 수상행식 무상
이와같이 모든 마음과 생각 등 (수상행식) 역시도, 관찰하여 무상하며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라.
如是觀者 則爲正觀
여시관자 즉위정관
이렇게 보는 것을 ‘바르게 본다'(혹은 ‘바른 관찰’이라)고 말한다.
▶ 왜냐하면 실제로 마음과 생각 등(그렇게 형상이 없는 것조차)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여, 마음을 매어 두고 고정하여 의지할 실다움이란 그 가운데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正觀者 則生厭離
정관자 즉생염리
바르게 보면, 의지할 바 없는 그것들에 염증과 괴리를 느껴 떠나고자 하게 되고,
厭離者 喜貪盡
염리자 희탐진
마음과 생각 등을 염증과 괴리를 느껴 떠나고자 하게 되면, 마음과 생각 등을 반기고 즐기려는 마음이 사라지며,
喜貪盡者 說心解脫
희탐진자 설심해탈
마음과 생각 등을 반기고 즐기려는 마음이 다하게 되면 이것을 ‘마음이 마음과 생각 등(수, 상, 행, 식)으로부터 해탈했다’고 말한다.
▶ 수, 상, 행, 식은 복잡한 개념이지만, 개략적으로 감각작용(내 감각), 연상작용(내 기억), 심리작용(내 마음), 인지/철학작용(내 추론과 생각), 등으로 대략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아주 간단히 줄여서 말하고 싶으면 ‘마음과 생각 등’이라 하면 얼추 맞다.
▶ 색이 외부의 형상있는 물질들, 특히 외부의 육신을 말한다면, 수상행식은 내부의 마음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외부의 육신이 무상할 뿐만 아니라 내부의 마음도 본래 무상하다는, 법공-아공의 체계를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如是 比丘
여시 비구
心解脫者 若欲自證 則能自證
심해탈자 약욕자증 즉능자증
이와같이, 비구들아 잘 들어라,
이와같이 마음이 해탈하게 되면 만일 깨닫고자 하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 不受後有
아생이진 범행이립 소작이작 자지 불수후유
‘내 범부의 삶은 다하였고, 성인으로서의 조건은 다 갖춰졌다. 고생하며 지어야 할 바는 이미 다 지었으며, 갚거나 받아야 할 것이 (마음의 해탈로 인해) 전부 소멸하여, 더이상 받을 윤회의 결박이 남아 있지 않음을, 스스로 안다.’
▶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 깨달음은 결국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아는 것이다. 깨달음 그 자체는 남이 대신 깨달아 줄 수도, 남이 대신 알려줄 수도 없다.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닦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은 깨달음은 증명법사가 필요 없다.)
▶ 갚거나 받아야 할 것이 (마음의 해탈로 인해) 전부 소멸하여, 다음 생의 몸을 더이상 받지 않음을 스스로 안다.’ / 에서 해석 교체. (2023. 12. 29.) / ‘유(有)’라는 것의 해석이 꼭 ‘몸’만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윤회의 결박을 받을 그 무엇’ 자체가 없다는 의미로 다시 번역했다. / 석가모니 당시에도 남이 한 욕을 내가 수용 안 하면 내게 돌아오지 않고 그 뱉은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한다. 그와 같이 ‘내게 돌아오지 않음’(왜냐면 이미 ‘나’라는 것이 없어서)이 곧 ‘유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욕한다고 거기에 열불내고 그 욕을 다 받아 버리면, 그로 인해 ‘돌아오는 속박의 유’가 <무한히 있게> 되고 말이다. 그게 윤회다.
如 觀 無常
여 관 무상
苦 空 非我 亦復如是
고 공 비아 역부여시
또한 그것들(색과 수상행식)을 ‘무상하다'(無常)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괴로운 것(苦), 비어있는 것(空), 내가 아닌 것(非我)으로 보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해탈하게 하고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 즉 초기 불교에서 무상(無常) = 고(苦) = 공(空) = 비아(非我) 는 서로 교환 가능하며, 동일한 것으로 통용하여 쓰는 것이다.
時諸比丘 聞佛所說 歡喜奉行
시제비구 문불소설 환희봉행
이에 수행승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는, 이를 기뻐 받들며 밤낮을 모르고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