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 (雜阿含經, Saṃyukta-āgama, Goryeo no.650, Taishō no. 99) #
– 송(宋)나라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문 번역 (宋天竺三藏求那跋陁羅 譯)
– 대한민국 문수도량 세속문파 해밀문(解密門) 문주 해밀장(解密長: 속명 법준法俊 필명 다르마슈레야Dharmaśreyaḥ) 한글 번역 및 해설
잡아함경 제2번경 (SĀ-2) :《여실사유경(如實思惟經)》 #
“물질(色)에 대해 사실 그대로에 비추어 바르게 생각해 보라는 가르침”
*바르게 생각하라는 것은 별 뜻이 아니라,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물론 무엇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덧붙여서 ‘여실(如實)하게’라는 부사어를 덧붙이고 있다.
*’여실(如實)하게’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말 그대로 보면 ‘사실과 같게’라고 해석할 수 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사실에 근거해서, 사실과 비교해서, 사실을 통해, 사실에 부합하게 등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즉, ‘바르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의 뜻은, 사실에 근거해서, 사실과 비교해서, 사실을 통해, 사실에 부합하게, 한 번 기억을 반추하고 경험을 되돌아 보아, ‘그러한지 그러하지 않은지’ 한 번 깊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색이 무상한지 무상하지 않은지, 식이 무상한지 무상하지 않은지. 그 결과 ‘색이 무상하다’는 것을 사실에 근거해 실제의 사실로서 알게 되면, 그러한 과정을 ‘정사유’ 곧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2번경 – 여실사유경(如實思惟經) #
如是我聞: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일시, 불주사위국기수급고독원.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머물고 계셨다.
爾時, 世尊告諸比丘:
이시, 세존고제비구:
그때 부처님께서 여러 수행승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於色當正思惟, 色無常如實知.
어색당정사유, 색무상여실지.
너희는 무릇 육신에 대해 바르게 사유하여,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고, 육신이 무상하다는 것을 사실과 같이 알라.
▶ *무상(無常): 항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무상의 반댓말은 ‘영원불변’이다. 즉 ‘무상하다’라는 말은 ‘영원불변하지 않다’라는 말이다. 지금의 상태가, 영원하지 않고, 항구불변하지 않으며, 심지어 아예 매 순간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육신을, 잘 관찰하여, 영원하지 않으며, 불변하지 않으며, 유한하고, 심지어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관찰해 내라는 뜻이다.
▶ *정사유(正思惟): 바른 사유.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른 사유’라는 말은, 이것이 모든 다른 사유 행위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수천년이 바뀌고, 종파가 무수히 새롭게 생겨나도, 여기에 부합하면 그것이 불교이고, 여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 1번경에서는 정관(正觀: 바른 관찰)에 대해 말하고, 2번경에서는 동일한 부분에 대해 정사유(正思惟: 바른 사유)라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1번경의 ‘바른 관찰'(관법 수행)이, 곧 팔정도의 2번째인 ‘정사유(正思惟)‘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즉 사실을 관찰하고, 그 사실과 자기 생각을 서로 비교하여 대조하는 작업을 반복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유’라는 것이다. 특히나 ‘바르다’는 평가는, 단순히 사실과 사유만이 아니라, 그 관찰과 그 사유를 통해 그것들이 ‘무상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에 이루어진다. 응당 사물을 볼 때, 그것이 ‘무상함’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데에 도달하면, 그것이 ‘바른 일’이라는 것이다.
所以者何?
소이자하?
어째서 그러한가?
比丘於色正思惟, 觀色無常如實知者, 於色欲貪斷;
비구어색정사유, 관색무상여실지자, 어색욕탐단;
비구여 육신에 대해 바르게 사유하여, 육신이 무상하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게 되면, 아름다운 육신에 대한 의욕과 만끽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 *색(色): 물질, 육신, 특히 ‘아름다운 육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물질로 해석하지 않고 ‘육신’ 혹은 ‘아름다운 육신’으로 해석한 것은, 이 설법이 이미 세속을 떠난 출가 수행승들을 향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의 재산이나 신분 관계를 이미 놓아버렸으므로, 가진 것 하나라곤 몸뚱이 뿐이다. 그러니 홀로 머물며 관법을 닦을 때에, 그 몸땡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아 이 몸땡이 영원한가 했더니 젊음은 금세 시들 것이요 아름다운 모습은 오간 데 없다. 어린 시절 모습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졌고, 슬금슬금 주름살이 늘어간다. 병들면 곤란하고 늙으면 쇠약하니, 이 몸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질 않고 사람을 괴롭게 한다. 몸이란 무상하구나. 물론 ‘물건’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 어떤 물질도 영원불변하는 바란 없다. 그 ‘무상한 모습’을 계속해서 사실 그대로 관찰하며, 그것과 비교하여 사유하여, ‘영원하다’ ‘절대적이다’ 라고 착각하는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도록 하라. 그러한 관찰과 사유, 그러한 관법 수행을 닦으라.
欲貪斷者, 說心解脫.
욕탐단자, 설심해탈.
그리하여 아름다운 육신에 대한 의욕과 만끽이 끊어지게 되면, 이것을 (육신으로부터) (육신에 대하여) ‘마음이 해탈했다’고 말한다.
▶ 육신의 영원하지 않음을 사실 그대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내 몸도 그러한데, 내 몸도 아닌 다른 물질들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물질의 무상함을 열심히 관찰하여, 염리심이 나고, 그로 인해 희탐심이 멸하면, 물질로부터 심해탈하는 것이다.
如是受, 想, 行, 識當正思惟, 觀識無常如實知.
여시수, 상, 행, 식당정사유, 관식무상여실지.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에 대하여도 바르게 사유하여, 예컨대 ‘내 인식은 늘 무상하다’는 것을 되짚어 관찰해 보고, 사실 그대로에 비추어, 그 무상함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도록 하라.
▶ 왜냐하면 실제로 수상행식과 같은 마음과 생각 등(그렇게 형상이 없는 것조차)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여, 마음을 매어 두고 고정하여 의지할 실다움이란 그 가운데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所以者何?
소이자하?
어째서 그러한가?
於識正思惟, 觀識無常者, 則於識欲貪斷;
어식정사유, 관식무상자, 즉어식욕탐단;
자신의 여러 인식에 대해 바르게 사유하여 자신의 인식이 실제로 모두 하나같이 다 무상하다는 것을 곰곰이 되짚어서 깨달아 알게 되면, 이내 곧 자신의 인식에 대한 의욕함과 자기의 인식이라며 이를 만끽하려 하는 마음이, 모두 끊어지게 된다.
欲貪斷者, 說心解脫.
욕탐단자, 설심해탈.
이렇게 마음과 생각, 자신의 인식 등에 대한 의욕과 만끽이 끊어지게 되면, 이것을 (생각과 마음 등으로부터) (마음과 생각 등에 대하여) ‘마음이 해탈했다’고 말한다.
▶ 수, 상, 행, 식은 복잡한 개념이지만, 개략적으로 감각작용(내 감각), 연상작용(내 기억), 심리작용(내 마음), 인지/철학작용(내 추론과 생각), 등으로 대략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아주 간단히 줄여서 말하고 싶으면 ‘마음과 생각 등’이라 하면 얼추 맞다.
▶ 색이 외부의 형상있는 물질들, 특히 외부의 육신을 말한다면, 수상행식은 내부의 마음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외부의 육신이 무상할 뿐만 아니라 내부의 마음도 본래 무상하다는, 법공-아공의 체계를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如是心解脫者, 若欲自證, 則能自證:
여시심해탈자, 약욕자증, 즉능자증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하면, 만일 스스로 깨닫고자 한다면 곧 스스로 깨달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 不受後有
아생이진 범행이립 소작이작 자지 불수후유
‘범부로서의 내 삶은 다하였고, 성인으로서 갖춰야 할 행동 조건들은 모두 마련되었으며, 지어야 할 바는 모두 지었으므로, 더이상 내세에 가서 주고 받아야 할 유(有)가 남지 않았다’
▶ 윤회 물결이 부과하는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탈하고, 이제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운 ‘부처로서의 삶’만이 남았을 뿐이다.
▶ 갚거나 받아야 할 것이 (마음의 해탈로 인해) 전부 소멸하여, 다음 생의 몸을 더이상 받지 않음을 스스로 안다.’ / 에서 해석 교체. (2023. 12. 29.) / ‘유(有)’라는 것의 해석이 꼭 ‘몸’만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윤회의 결박을 받을 그 무엇’ 자체가 없다는 의미로 다시 번역했다. / 석가모니 당시에도 남이 한 욕을 내가 수용 안 하면 내게 돌아오지 않고 그 뱉은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한다. 그와 같이 ‘내게 돌아오지 않음’(왜냐면 이미 ‘나’라는 것이 없어서)이 곧 ‘유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욕한다고 거기에 열불내고 그 욕을 다 받아 버리면, 그로 인해 ‘돌아오는 속박의 유’가 <무한히 있게> 되고 말이다. 그게 윤회다.
如是正思惟無常, 苦, 空, 非我, 亦復如是.
여시정사유무상, 고, 공, 비아, 역부여시.
이와 같이, 즉 그것들(색과 수상행식)에 대해, 곰곰이 한 번 되짚어 가며, ‘무상하다’고, 사실 그대로(=사실과 같이, =사실에 근거하여), 바르게 사유한 것처럼,
그것들(색과 수상행식)에 대해 ‘고통이다’, ‘비었다’, ‘내가 아니다(=내 의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사실 그대로(=사실과 같이, =사실에 근거하여) 바르게 사유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같다. (심해탈과 깨달음을 얻게 한다.)
▶ 즉 초기 불교에서 무상(無常) = 고(苦) = 공(空) = 비아(非我) 는 서로 교환 가능하며, 동일한 것으로 통용하여 쓰는 것이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을 주제로 하든, 주의 깊게 사유하고 되짚어 관찰하면, 그 결과는 모두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심해탈하고 스스로 깨달아 아는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時,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시, 제비구문불소설, 환희봉행.
이에 수행승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는, 이를 기뻐 받들며 밤낮을 모르고 행하였다.